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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26. 2023

선생님 vs 저기요

   손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란 호칭을 통용한다. 상대를 실제보다 낮추기는 미안하지만 더 높이면서 손해 보기는 싫은 차원에서 제일 만만한 호칭이라 여겨서이다. 하지만 가끔 어색할 때도 있다. 깎새보다 연장자이거나 연배가 엇비슷할 때나 어울리지 새파랗게 젊은 치들한테까지 '선생님'이라 알아서 기는 건 여간 아닌 과공비례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한 칼럼에서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주장은 50년 전에 존 롤스에 의해 이미 제기됐다면서 능력이 ‘재능’과 ‘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재능은 하필이면 내게 주어진 우연한 선물(gift는 재능이자 선물이다)이어서 공동 자산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노력 또한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모든 노력이 다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우연적인 데가 있다고 설파했다. 하여 성공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평등원칙이 아니라 조건적 차등원칙을 적용해야 하되 능력에 힘입은 성공은 장려되고 평가돼야 하지만 그 성과가 과잉 보상일 때 그것이 공동체로 환원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상대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그 호칭에 대한 제언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   ‘동무’도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선생님’이 낫겠다(이 호칭이 이중 높임이라는 건 일단 차치하자). 이미 쓰고 있지만 더 전면적으로 사용했으면 싶다. 선생先生이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겠는데, 단지 연장자라는 뜻으로 말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새기면서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낸 그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 판사에게 식당 종업원은 선생님이고 의사에게 아파트 경비원은 선생님이다. 누구나 다른 누구에게 선생이다. 일단 선생님이라 부르고 나면, 최소한 반말을 하거나 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신형철 문학평론가, <누구나 누구에게 선생님>, 경향신문, 2021.01.25에서)


​   편해서 부르는 호칭에 이토록 웅장한 뜻이 숨어 있을 줄이야.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 그럼에도 고약한 성질머리는 어디 가질 않아서 꼴같잖게 무례하고 오만한 진상과 맞닥뜨릴라치면 간도 쓸개도 없이 간살맞게 잘도 나부대던 '선생님'은 휴지통으로 직행해 버린다. 가당찮은 호칭으로 대접하느니 묵묵부답으로 할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허나 어쩔 수 없이 호명해야 한다면 성의도 없고 괜히 무시당해 화가 날 지경일 이 호칭으로 '선생님'을 대신한다.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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