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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28. 2023

뚱뚱이와 홀쭉이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듯 머리 깎으러 꼭 같이 움직이는 중년 동년배 둘은 겉으로만 봐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늠름하고 다부진 풍채를 더 부각시키는 격렬한 스포츠형을 선호하는 한쪽에 비해 조막만한 머리통에 머리숱까지 헤실헤실한데다 걸어다니는 게 신기하게 야윈 다른 한쪽은 흡사 '뚱뚱이와 홀쭉이'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그들이 붙어다니는 까닭은 하는 일이 비슷하고 사는 집은 한참 떨어져 있을지언정 점방은 엎어지면 코가 닿아서라나. 둘은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술잔을 기울인다고 했다. 출출해질 오후 나절, 눈빛만 스윽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길로 어깨 겯고 단골집 직행이랬다. 할 말이 무에 그리 많아서 낮에 보고 밤 늦도록 또 술잔을 기울이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그냥 버릇이 됐단다. 엇비슷한 일을 하는 치들끼리 통하는 애환이란 게 한 이불 덮고 자는 마누라라도 못 알아먹는다면서. 덧붙여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오래가는 법이라고 명토를 박아 버린다. 벗은 쪽수로 따지는 게 아님을 잘 아는 깎새는 그 둘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머리통 커졌다고 자식들은 밖으로만 나싸대 자연 마누라 얼굴만 쳐다보지만 그 마누라도 소싯적 마누라가 아닌지라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이니 식도락이니 부재중일 때가 더 많아졌다. 언제는 식구들 얼굴 잊어버리지나 말라고 면박을 주더니만 지금은 제발 누구든 만나 노는 시늉이라도 하라나 뭐라나. 누군 안 그러고 싶어서 방바닥만 벅벅 긁을까. 궁한 마음에 물색해본들 마땅한 위인이 안 떠오르니 문제지. '우리가 남이가!'보다는 '가악중에 무슨 일로?' 괴이쩍어할 반응이 뻔할 기별은 이쪽에서 먼저 회의적이라 단념한다.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대면서 칩거했던 건 인간관계의 난맥상에서 횡보를 거듭하는 것보다야 낫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허나 이런 식으로 계속 살다간 더럽게 재미없이 죽을지 모른다고 겁이 덜컥 난다. 한때는 모임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덕 일어나던 놈이었는데 왜 이 모양이 됐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골라서 가던 송년모임은 모두 몇 해 전부터 뚝 끊겼다. 10여 년 전까지 '시골의사'라는 닉네임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백수는 제 이름만 불러줘도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가슴을 후벼판다. 

   『임꺽정』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수다스럽다는 것이다. 그들은 틈만 나면 만나서 밤을 새워 이야기한다. 죽일까 살릴까 하다가도 잠깐 이야기나 하자면서 각자 인생 역정을 늘어놓으면 거기에 감화돼 뚝딱 의형제를 맺는다. 시중에 떠도는 소문이 어떻든지 간에 당사자한테 단도직입해 진상을 들어 시시비비를 가린다든가 아무튼 인간관계의 시종이 오롯이 이야기하기에 달린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하기사 지금처럼 페북이니 카톡, 밴드 따위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용건이 생기면 우선 만나고 볼 일이고 만나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후사를 도모하는 게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다. 혼자서도 재미나게 놀 만한 게 지천에 깔린 지금에 비해 그 옛날에는 뭐가 있었겠는가? 그저 주안상 앞에 두고 밤새 노닥거리는 거 말고는 말이다. 요는 얼굴 맞대고 지겹도록 떠들다 보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게 상대를 꿰뚫는다는 거다. 그러다 결국 '뚱뚱이와 홀쭉이'가 되고 말이지. 깎새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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