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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06. 2024

옴니버스

   <옴니버스>란 낱말을 '영화나 연극의 한 형식으로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만든 한 편의 작품'쯤으로 여기고 으레 써먹지만 사전을 뒤져 보면 의외로 부차적인 뜻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탈 수 있는 자동차'가 이 낱말을 표상하는 본래적 의미로 사전 맨 윗줄에 걸려 있어 좀 낯설다.

   철학자 김용석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의 어원을 들먹거리면서 그 말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현실세계를 탐구하는 칼럼을 게재하는 중이다. 이 철학자가 풀어낸 <옴니버스>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옴니버스>가 등장하게 된 내력이 전래동화를 읽듯 재미지면서 그 본래적 의미가 갖는 삶의 의미를 곱씹는 계기도 마련해 준다. 더불어 6411번 버스로 상징되는 고故 노회찬 의원을 떠올려 정치인의 위선도 꼬집는다. 읽어볼 만하다. 


​   19세기 초 프랑스 낭트 교외의 한 옥수수 방앗간 주인과 낭트 도심에 있던 모자가게 주인의 사업 아이디어에서 비롯한다. 방앗간 주인 보드리 씨는 방아 작업의 부산물로 나오는 뜨거운 물에 착안하여 방앗간 옆에 목욕탕을 운영하기로 했다. 그는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낭트 도심에서부터 사람들을 마차로 태워 오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종의 ‘셔틀버스’ 아이디어를 가졌던 것이다.​

   낭트 도심에 있는 목욕탕 마차의 정류장은 대형 모자가게 앞이었는데, 가게 주인 옴네 씨는 자기 사업을 광고하는 데에 머리를 썼다. 그는 자신의 성(姓)이 라틴어 글자와 유사하다는 데에 착안해서 ‘옴네스 옴니부스’(Omnes Omnibus)라고 쓴 가게 간판을 내걸었다.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옴네의 가게’라는 뜻도 되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것들’이란 뜻도 되어 눈길을 끌었다. 목욕탕에 가지 않는 사람도 그 마차를 탔고 마차는 자연스레 많은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는 이동수단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보드리의 셔틀 마차를 프랑스어 발음으로 ‘옴니뷔스’(omnibu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보드리 씨와 옴네 씨의 시도는 각각 사업 목적에 맞게 합리적이어서 필연적으로 이득을 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모자가게 광고와 셔틀 마차 사업의 융합은 그야말로 우연이었지만 보드리의 사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방앗간과 목욕탕 사업을 접고 1828년 파리에까지 진출해 본격적인 대중교통 수단으로서 옴니뷔스 사업을 벌였다. 이듬해 영국 런던에서도 유사한 사업이 시작되었고 그런 교통수단을 영어식 발음으로 ‘옴니버스’라고 불렀다. 대중적 언어는 축약되는 경향이 있는지라, 밑말은 잘려나가고 씨끝만 남아 ‘버스’가 되었다. 나라말마다 발음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 단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었고, 우리에게도 들온말이 되어 매우 친숙해졌다.​

   19세기 말에는 모터 버스가 본격 생산되기 시작해 서구 주요 도시들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말이 끌던 시대에서 엔진을 장착한 버스에 이르기까지 그 동력은 변해왔어도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한 버스의 골격 디자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버스는 우연히 얻은 ‘옴니버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적은 비용으로 누구든 탈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우리 삶 속에 넓게 퍼졌고, 종종 삶의 깊은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 매체가 되기도 했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버스와 연관된 삶에 무지하다. 고관대작들이 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요즘 버스요금이 얼마인지 모르는 것을 트집 잡으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업무 특성상 언제 버스 타겠냐 하며 그런 무지를 옹호하는 기류가 언제부턴가 정치권에 흐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대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잠행을 해왔다. 잠행해서라도 버스의 삶, 곧 모든 보통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택시기사와 대화를 나눠보아야 세태를 잘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가끔이라도 버스를 타보면 승객과 대화 없이도 세태를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실언과 막말은 판쳐도 위정자의 덕목인 명연설이 희귀한 우리 정치 무대에서 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래 남아 있는 명연설도 버스와 연관된 것이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연설 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서민들 삶 속에서 서민과 함께했던 정치인의 말이 명연설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6411번 버스 안을 묘사하며 그곳에 투영된 서민들의 지난한 삶을 우리 일상의 구체적 언어로 세세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연설에도 버스요금 언급은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이른 새벽에 버스 타는 사람들의 삶에 무지했다고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못한다. 미사여구도 거창한 구호도 없지만 그의 연설은 구구절절 그가 버스 안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계절보다 한겨울에 버스 타는 일은 고되다. 찬 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려서만은 아니다. 겨울이면 두꺼운 옷에 버스 안이 더욱 비좁아지기 때문만도 아니다. 통상 연말연시에 버스요금이 올라서만도 아니다. 정치인들은 ‘민생’이란 말을 전시하듯 입술에 달고 다닌다. 하지만 서민의 구체적 삶을 간과할수록 민생이란 말은 추상화된다. 버스의 일상에는 민생의 옴니버스, 곧 민생의 온갖 것들이 진액처럼 스며 있다. 이에 무심하고 무지한 위정자들이 있기 때문에 한겨울에 버스 타는 일은…, 무척 고되다.(<김용석의 언어탐방>, 한겨레, 2023.12.06 에서 발췌)


(전문)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91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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