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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바 Jan 22. 2020

현금 없는 사회의 완성, 디지털 화폐

얼마 전 중국에서 시진핑 주석이 공식석상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언급하고, 중국 인민은행이 디지털 화폐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 시장이 들썩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중국 정부가 중국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와 블록체인과는 무관하다는 선을 긋자 암호화폐 시장은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 디지털 화폐 개념도 ( 출처 : 매일경제신문 )


그럼 도대체 디지털 화폐는 무엇이고? 암호 화폐는 무엇일까요?


우선 디지털 화폐(Digital Currency)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디지털 화폐란 종이 지폐나 동전 같은 실물 화폐 없이 디지털(전자적) 형태로만 발급, 교환되는 돈 또는 증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폐나 동전 대신 칩이나 카드에 담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 화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교통을 탈 때 쓰는 선불식 교통카드나 돈이 충전되어 있는 기프트 카드 같은 것을 상점뿐만 아니라 은행에서도 쓰고, 개인 간에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들어진다고 상상해보시면 됩니다. 기존에는 전자 화폐, 가상 화폐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디지털 화폐라는 용어로 통일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디지털 화폐의 개념에 블록체인이라는 인증 기술을 얹어서 만들면 흔히 암호화폐(Crypto Currency)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채굴이니 탈중앙화니 이런 것들은 사실상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마케팅적 요소라고 보시고 무시하셔도 됩니다. '중앙은행이 돈을 많이 풀어서 망하고 나면,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는 암호 화폐가 대세가 될 건데, 게다가 이건 수량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주 가치 있는 거야!'라고 사람들을 믿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디지털 화폐가 더 큰 개념이고, 암호화폐는 그 안에서 기술적 특징을 갖춘 특정 종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혹시 탈중앙화가 중요하다고 강변하는 암호화폐 투자자가 있다면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중앙은행이 블록체인이 디지털 화폐를 만들어도 암호화폐라고 부를 거잖아요?'


예를 들자면, 페이스북이 페이스북 내에서 개인 간에 서로 주고받거나 아니면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 결재에 쓰일 수 있도록 '리브라'라고 부르는 자체 화폐를 만든다면 그 '리브라'는 디지털 화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싸이월드 도토리라는 전설적인 존재가 있었는데...) 그런데 이 '리브라'라고 부르는 디지털 화폐를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만든다면 그건 암호화폐라고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이나 유럽 등에서 검토 중인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뜻합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지 않은 디지털 화폐가 일종의 백화점 상품권 같은 거라면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는 법정 화폐이므로 조금 다르다 뭐 이런 뜻으로 구분하기 위해 CBDC라는 단어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CBDC는 동전이나 지폐와 마찬가지로 해당 중앙은행의 힘이 닿는 어디서나 통용되는 화폐로써 스마트폰이나 칩, 카드 등에 담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출처 : 국민일보 )


그렇다면 중국이나 유럽은 왜 디지털 화폐 발행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것은 각 국가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에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스웨덴의 경우 현금 없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디지털 화폐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웨덴은 현재 현금 사용률이 전체 결제 금액 중 2%도 안 되는 상황으로, 각종 상점들이 현금을 안 받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현금을 취급하지 않는 은행 점포도 전체 은행 점포 중 절반이 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현금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스마트폰을 잘 다루지 못하면서 신용카드도 없는 디지털 소외계층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폰을 잘 다루지 못하면서 신용카드도 없는 사람들은 결국 현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은행에 가도 현금이 없고, 근처에 현금을 찾을 수 있는 ATM기기도 없다 보니 현금을 찾기 위해 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현금을 대체하면서 디지털 소외계층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두 번째로 유럽연합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디지털 화폐 검토 소식은 스웨덴과는 속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유럽은 미국이나 아시아와는 달리 아직도 2008년 금융위기의 후유증에서 완벽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역별로 조금씩 사정이 다르지만, 남부 유럽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아직도 경제가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그 돈이 다시 중앙은행에 예치되기만 할 뿐,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 투자와 소비에 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 통화주의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과 합리적 경제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통화승수가 낮다는 것은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미지 출처 : 한국경제신문 )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중앙은행(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은행)이 시중에 돈을 많이 풀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보다는 물건이나 부동산, 주식 같은 실물 자산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을 쥐고 있는 대신 상업은행(우리나라로 치면 신한은행이나 국민은행 등)들로부터 돈을 빌려서라도 물건을 사거나 투자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실물 자산의 가치는 높아지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유럽에서는 이러한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이 동작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이 상업은행들에 돈을 풀어도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 보니 상업은행들은 중앙은행에 돈을 그대로 다시 예치해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유럽에서 사용되는 마이너스 금리 방식은 이렇게 상업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해둔 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여 시간이 흐르면 돈이 줄어들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상업은행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중앙은행에 돈을 예치해두는 대신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겠느냐는 발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업은행들을 독려하기 위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만으로도 원래의 의도한 효과(돈을 쥐고 있을수록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지금 당장 돈을 써서 소비를 해라!)가 완벽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상업은행들이 아무리 대출을 해주고 싶어도 사람들이 돈을 안 빌리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상업은행들도 고객에게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상업은행들은 고객에 대해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현금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상업은행들이 고객의 예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려고 하는 순간, 고객이 예금 전액을 현금으로 인출하여 보유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출금된 현금에 대해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마이너스 금리임에도 저축률이 증가하는 국가들 ( 출처 : 월스트리트 저널 )


바로 이 대목에서 유럽연합이 디지털 화폐를 검토하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현금에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현금 대신 디지털 화폐 형태로 갖고 있게 된다면 이 디지털 화폐에 대해서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현금 대신 제 스마트폰 칩에 디지털 화폐 100유로(대략 12만 원) 정도를 갖고 있는 상태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때 디지털 화폐들은 은행의 서버나 상점들의 단말기, 아니면 자체적인 통신 기능을 통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필요하다면 마치 제 은행 계좌에 있는 돈에 이자가 붙거나 수수료를 지불하도록 만들 수 있듯이 제 디지털 화폐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 금리를 연 -1.0%로 적용한다면 제가 보유한 디지털 화폐는 1년 뒤 자연스럽게 99 유로로 바뀌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될까요? 당연히 디지털 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것보다는 당장 물건을 사거나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투자를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물론 달러나 다른 나라 통화로 환전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유럽연합에서 살면서 유럽연합에서 돈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유로로 재환전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다른 나라 통화로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유럽연합에서는 사람들의 소비, 투자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상업은행을 대상으로 한 마이너스 금리가 아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마이너스 금리를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에게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현금 대신 디지털 화폐를 들고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설명한 스웨덴이 디지털 화폐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위에서 소개한 유럽의 경우들보다 사정이 좀 더 복잡합니다. 아니 복잡하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뭔가 이유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 고위 공직자들의 설명을 통해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편의성입니다. 이것은 중국 고위 관계자들이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화폐를 만들면 어떤 편의성이 증가하길래 편의성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배경에는 중국의 뒤늦은 자본주의화 역사가 숨어있습니다.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해온 지난 40년은 공교롭게도 전 세계적으로 정보화 혁명을 겪는 시기였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사람들이 사용하는 결제 시스템의 보급이 조금 독특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선진국 들에서는 통상적으로 (1) 현금 - (2) 예금계좌 기반 신용 결제수단(수표) - (3) 여신성 신용 결제수단(신용카드) - (4) 디지털 결제수단의 순서로 보급이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뒤늦은 자본주의화로 인해 수표나 신용카드를 통한 결제가 보급될 틈이 없었습니다. 대신 전자결제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중국에선 신용카드보다 스마트폰과 QR코드를 이용한 결제가 더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이 뒤늦게 발전하면서 웨건이나 해치백이 보급되기 전에 세단에서 SUV로 바로 흐름이 넘어간 것과 같은 현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중국은 아직 예금계좌 보급률이 80% 정도 수준(미국 93%, 한국 95% 등 선진국은 보통 90% 이상 보급됨)이며, 전자결제 방식은 디지털 기술에 소외된 계층에게는 넘어야 될 문턱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를 이용하면 금융 서비스나 디지털 기술에 소외된 사람들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은행이나 상점에서 디지털 화폐가 들어있는 칩이나 카드를 사서 사용한다면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 전자결제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술 선도를 위한 시도입니다. 이 또한 중국 고위 공직자들이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만, 일부 산업 분야를 제외한 전반적인 IT기술에 있어서 중국은 사실상 미국 다음에 위치한 IT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로는 미국 못지않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슈퍼 컴퓨터를 가장 많이 개발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온라인 쇼핑과 전자 지급결제 시장을 보유한 국가입니다. 그런 중국이 디지털 화폐와 그 운영을 위한 인프라를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다면? 아마 자체적으로 디지털 화폐를 연구하고 있는 국가들을 제외한 많은 국가들에서 중국식 디지털 화폐 기술을 받아들이고, 디지털 화폐의 표준이 중국에 의해 쓰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중국이 공을 들이는 제3세계 국가들(아프리카, 남미 등)은 아직도 금융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곳들이 많습니다. 이런 국가들은 중국이 개발한 디지털 화폐 인프라의 보급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페이스북이 개발 중이라는 자체적인 디지털 화폐인 '리브라' 또한 이렇게 금융 인프라가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 국가들을 겨냥한 서비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페이스북의 '리브라' 계획이 발표되자 중국이 디지털 화폐에 대해 속도를 내고, 반대로 미국 내 반발로 인해 '리브라' 계획이 불투명해지자 중국이 다시 디지털 화폐에 대해 속도조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다른 국가들이나 잠재적 경쟁자들보다는 더 빠른 출시를 원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위안화 국제화를 위한 포석입니다. 위에서 페이스북 '리브라'가 금융 인프라가 제대로 보급되지 못한 제3세계 국가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리브라'의 목표는 현지 화폐의 유통(자국 정부를 신뢰하지 않아 달러가 아닌 돈을 안 받는 곳들도 있습니다.)이나 카드 결제 등이 되지 않는 곳에서도 인터넷만 된다면 페이스북 '리브라'를 이용해 상품과 재화를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리브라'라는 단어의 위치에 중국 인민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위안화'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위안화를 기축통화 수준으로 격상시킬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국제 사회에서 위안화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시도를 해볼 만한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고위 공직자들도 자국의 디지털 화폐가 사용이 손쉬우니 외국인들도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첨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경제 활성화입니다. 디지털 화폐가 발행되어 일정 수준 이상 보급이 되면 현금의 사용을 중단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모두 들고 나와 디지털 화폐로 바꿔가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현금 없는 사회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현금을 디지털 화폐로 전환하는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현금들이 모두 튀어나오게 되므로 마치 화폐의 단위를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과 같은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화폐의 단위를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논의가 최근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1달러가 우리나라 돈으로는 무려 1200원 정도 하다 보니 계산이나 거래에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고, 위에서 제가 설명드린 바와 같이 숨겨져 있는 (비자금용) 현금들을 다 끄집어내어 경제 활성화를 시도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국은행이 5만 원짜리 화폐를 발행해도 그것이 다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현상을 막자는 것입니다.


( 출처 : 한국경제신문 )


우리나라에선 이미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숨겨진 현금들을 강제로 끄집어내기 위해 10환을 1원으로 교체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리디노미네이션의 목적이 바로 현금을 다 끄집어내서 강제로 투자에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은행에 현금을 가지고 오더라도 한 가구당 교환할 수 있는 돈은 5,000환에 불과했고, 그 이상의 돈은 일정기간 이상 은행에 강제 저금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은행은 그 돈으로 대출을 활성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이 당장 이렇게 현금을 끄집어내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진 않겠지만, 일단 디지털 화폐를 보급하기 시작하고 현금 없는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당장 가지고 있는 현금을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실물 자산으로 바꿔두려는 시도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실물 경제 활성화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금이나 달러의 수요가 촉발되는 역효과도 일어날 수 있겠지만...)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는 통제 강화를 위한 도입입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아직도 공산당 1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체제 유지를 위해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사회 통제에 있어서만큼은 한 번도 양보를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보수적 공산당을 개혁하고, 중국 시장을 개방하여 중국식 공산주의의 100년 미래를 설계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인 덩샤오핑 조차도 1989년 천안문 사태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피의 철퇴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중국 정부가 인공지능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인공지능을 이용한 통제 강화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중국 정부에게 디지털 화폐의 보급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중국 사회에 비트코인이나 페이스북의 '리브라'와 같이 중앙에서 통제를 할 수 없는 디지털 화폐가 보급될 경우 치명적인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손쓸새 없이 거대한 자금이 해외로 나가버릴 수 있고, 개인 간의 자금 거래를 추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부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탈중앙화라는 단어는 알레르기 반응이 나올법한 단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 출처 : 금융위원회 )



거대 IT기업들이 꿈꾸는 탈 중앙화 된 디지털 화폐는 현재처럼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금융시장을 완전히 파괴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일본 등의 국가에서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통해 유동성(돈)을 공급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이 자금을 페이스북 리브라로 옮겨서 해외 사이트 등에서 사용한다면 중앙은행이 원하는 의도가 달성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엔케리 트레이드(값이 싸진 엔화를 빌려 값이 비싼 다른 나라 통화로 바꿔 그 나라에서 다시 투자하는 것)는 이미 발생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엔화를 다른 나라 통화로 바꾸는 행위를 통해 엔화의 가치가 떨어져서 일본 제조업의 수출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엔화가 페이스북 리브라로 빨려 들어간 상태에서 페이스북이 그 엔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리브라를 나눠줘서 그걸 해외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돈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엔화 가치도 변하지 않는 (일본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디지털 화폐가 보급되는 것은 새로운 기회가 됩니다. 디지털 화폐가 보급되고 현금이 사라질 경우 개인/기업 간 모든 자금이동이 다 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은 화폐 위조와 자금세탁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현금이 사라지고 디지털 화폐가 보급되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덤으로 위에 유럽연합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통제하여 강제로 세금을 걷거나 아니면 반대로 돈을 더 주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야말로 온라인 게임 속 세상처럼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디지털 화폐는 그 개념이나 기술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낼 파급력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아직까지 섣불리 그것을 시도한 국가는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모든 중앙은행과 정부들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이슈이므로 어느 한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급속도로 보급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향후 몇 년 간은 계속해서 디지털 화폐의 발행 이슈가 재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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