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가 여기저기 끌고 다녀준 덕에 난 운동을 꽤 좋아한다. 수영, 탁구, 야구(동전 배팅장)를 하는 것 못지않게 야구나 축구경기를 보는 것도 즐긴다. 슬프게도 야구는 하...놔... 보살팬이다. ㅠㅠ 테니스는 몇번 쳐보다 라켓이 은근 무겁길래 팔 나가겠다 싶었는데, 여튼 테니스나 배드민턴은 지인 중에 크루가 잘 안만들어져 끝내 익히지 못했다.골프는 맛보기했을 때 영 취향에 안맞았고 비용/시간적으로 부담스럽던 차에 인생 스포츠인 스쿼시를 만났다.
PSA 월드 챔피언쉽 @이집트 피라미드 앞
당시 내 지도교수님의 설계수업에서 나와 함께 공동강의를 하던,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동경하던 선배를 따라 스쿼시를 시작했으나, 어느덧 그 선배는 이 곳을 떠나가고 나홀로 남아 계속 치고있다. 강의가 끝나는 두 요일마다 대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교수님 이름이 공에 새겨져있다 상상하면서 둘이 함께 신나게 라켓을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ㅋㅋㅋㅋ 그리곤 강사들이 각자 다른 방향의 목소리를 내기보단 적어도 몇몇은 같은 방향의 목소리를 내거나 볼륨의 세기와텐션을 낮춰야가운데 낀 학생들이 죽어나가지 않을거라며 뒤에서 작당모의?를 하기도 했다. :)
내가 30대 중반 느즈막히 스쿼시를 시작했을 때, 아쉽게도 모든 운동을 다 잘하는 만능스포츠맨이던 아버진 이미 50대에 무릎에 무리가 간다며 진즉에 스쿼시를 관두셔서 같이 상대해 보진 못했다. 윌슨제품인 해머란 라켓을 물려받았으나 줄의 텐션을 풀어놓지 않아 묠니르(애칭)에 금이 가버려 써보지도 못했다. 본가에 내려가면 난 항상 툴툴거리는 남동생을 끌고서 아빠와 함께 탁구를 치곤 했다. 사회에서 만난 지인 중에(탁구클럽 제외ㅋ) 내가 절대로 한세트 조차 못이기겠다 싶었던 상대는 20대에 마지막으로 사귀던 남친과 아빠/큰아빠들 뿐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지금은 내 껌(딱지)?이었던 동생에게도 종종 진다.
00. 스쿼시의 특성
타종목에 비해 분당 칼로리 소모량이 압도적인 고강도 운동인 스쿼시는 쾌감 쩌는 총탄 터지는 소리와, 벽을 보고 혼자(nobody) 칠 수 있는 실내운동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러나 오히려 혼자 오는 사람이 많아 현장에서 레벨이 맞아보이는 아무하고나(anybody▶somebody) 붙잡고 한 게임 쳐달라 하기 쉬운 문화가 있는 상호작용운동이다. 10인 정도까지 모두가(everybody) 함께 칠 수 있도록, ㅁ자 공간의 한켠에 대기장소를 두고 ㄱ자 부분만 쓰는 게임도 있다. 얼핏 테니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폼/사용하는 몸 근육의 방향이 꽤 다르며 5분만에 땀에 푹 쩔 정도로 스피드와 순간 에너지소모량(테니스의 2배, 탁구의 3배)이 엄청난 휘모리장단 같은 운동이다.
라켓 무게는 테니스의 절반 수준으로 배드민턴보다는 1.5배 무거운 수준이다.(110~200g, 주로 115~140g) 공은 탁구/골프공과 같은 사이즈(⌀=40mm)지만 고무 재질이라 탄성이 강하고 스핀이 많이 걸리진 않는다. 마치 탁구라켓의 러버 표면 vs 공 관계처럼 라켓 줄의 텐션을 어떻게 셋팅하느냐에 따라 스핀을 쉽게 줄 수도 있지만, 대게는 냅다 후려치는 스매시를 추구하는 운동이긴 하다. :D탄성력에 따라 공 종류가 여러개인데, 게임용인 노란공은 바운스가 적기 때문에 한참 때려서? 따끈하게 예열한 뒤에 칠 수 있다.온도/열기에 따라 탄성력이 달라지기에, 고렙들끼리 칠수록 공이 뜨겁게 달궈지며 잘튀어나가 게임 속도가 점점 미친듯이 빨라진다. (저렙들끼리 노란공을 치면 차갑게 식어서 올라오지 않으므로 초보땐 주로 파란공을 사용한다.)
스쿼시공 종류별 바운스 : 프로용(노란공)~비기너용(파란공)
한편, 복싱처럼 상대방과 선이 나뉘지 않은 사각의 한 공간 안에서 도구/라켓을 들고 티키타카 하므로 경로가 방해되지 않도록 나와 상대의 위치를 봐가며 피해서 휘둘러야한다. 또한 거울처럼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에 어느 순간 편/경계가 모호해진다. 호흡이 잘맞으면 둘이 한 몸이 된듯 돌아가며 치다가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의 판도/위치를 재인식하는데 최적화된 게임이다. 때문에 연인/부부/동업 관계가 함께하기 꽤 좋은 운동이란 생각을 했었다. 개인적으론 데칼코마니같은 왼손잡이와 맞붙는 걸 선호하는데, 강사님의 양손타법을 목격한 적도...ㅋ
스쿼시 코트 : 3벽의 붉은 선 + 뒷벽 아래로 쳐야하며, 어디로든 쉽게 쫓아갈 수 있는 중앙(T존)을 차지해야 편하게 칠 수 있다.
01. 스쿼시와 공간에서의 위치(position)
그나저나 레벨 차이가 나면 중앙(T존)을 차지하는 플레이어가 고정되고 쪼렙이 똥개훈련 당하지만, 실력이 엇비슷하면 서로의 자리(position)가 끊임없이 교체되며 다리/무릎이 계속 갈린다.(trading places)
공간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은 당구(3,4구)와 매우 비슷하다. 모로가든 앞벽으로 보내고 바닥에 한번 이하로 튕기는 내에서 아무때나 쳐도 되기에 천장을 제외한 뒷벽까지 4면의 1~3 쿠션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스피드/힘과 대응력만 살아있다면 기회를 놓쳤더라도 몇번더 기회가 주어지곤 한다.바닥을 두번 치는건공/기회가 다시 올라오기 쉽지 않아서인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탄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 적절한 순간/기회가 찾아왔을 때 힘을 실어 다시금 앞으로 보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맞춰야할 목표(=당구 빨간공)만 보다간상대방(=흰공vs노란공)과 경로/길이 부딪히며 쫑나기도 한다. 이 때는 "Let(렛)"을 불러서 합의 하에 초기화 시키거나, "Stroke(스트록)" 이라 해서 경로/스윙방해에 따른 패널티를 받는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마세이(300 이상 금지?!)처럼 일정 내공?이상 시도하는, 뒷벽을 먼저 때려 앞으로 보내는 샷도 종종 나온다. 나는 강화유리벽보다 약한, 티타늄이나 텅스텐을 안섞은 카본(C) 소재의 내 헤리티지 라켓도 소중하지만, 구력이 안되는 쫄보라 뒷벽을 강하게 때리는건 시도를 안해봤다. 당구도 맛세이는 언감생심!! 파워가 후달려 2바퀴 레지/니주조차 잘 못돌리는...
영화에서는 최근작인 <레드룸스>(2023)를 비롯해 <하이-라이즈>(201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헤드헌터>(2011), <더 게임>(1990), <월 스트리트>(1987), <맨하탄>(1979), <러브 스토리>(1970) 등에 스쿼시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밖에 <아메리칸 사이코>(2000) 속 대사와 드라마 <퀸스갬빗>(2020), <빌리언스>(2016~)에도 등장한다. <엽기적인 그녀>(2001)의 경우, 코트는 스쿼시장이었지만 공/라켓 모양은 천장까지 다 쓰는 라켓볼인 듯 하다. 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기 위해 쓰인 듯한... :D
<엽기적인 그녀> 에서 옆벽에 튄 듯한 공에 맞는 차태현
마치 스크린을 바라보듯 다같이 한 방향을 보면서 치는 스쿼시는 과연 누가 진짜로 내 편인지 알아내고싶은 스파이/스릴러/정치/경제물에 꽤나 잘어울린다. 즉 숨겨진 속내를 파악하는 심리게임이나 은밀하게 내부에서 판을 짜는 작당모의, 곁눈질로 상대의 간을 보며 자리/위치를 차지하려는 권력구도를 은유하기 대단히 좋은 스포츠인 것이다. 본래 18C 영국의런던 감옥에 갇힌 신용불량자/채무자들이 테니스처럼 공놀이했던 것에서 탄생했기에 나름 돈/장비값이 꽤 적게 드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간을 둘러싼 재빠른 수싸움 때문인지 희한하게도 화이트컬러/지식인/상류(중산)층의 이미지를 갖게된 스포츠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