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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Apr 19. 2022

커피와 코코아

다섯살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2017년 2월 8일 맑음.


오늘 아침, 감기 끝물인 점식이와 소아과에 갔다.
평소보다 늦은 열한시 즈음 도착했는데, 손님이 우리 뿐이었다. 열한시반부터 어린이집 점심식사 시간이라 그 전에는 등원을 해야하는데 충분히 도착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십분을 넘게 기다려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십분이 더 흘렀지만 진료실에서 나오는 환자는 없고 대기실 손님만 늘어갔다. 점점 초조해졌다. 어린이집에 열한시반 전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지금 출발해야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결국 간호사 선생님께 따지듯 여쭤보았다.
-
왜 진료를 안보세요?
-
원래 열한시부터 십오분 정도 쉬는 시간이에요. 오늘 좀 길어지긴 하네요.
-
헐! 점심시간도 따로 있는데 오전에 쉬는 시간이라니. 이 시간에 온적이 없었고 진료시간 안내에 쉬는 시간 따위는 적혀 있지 않으니 알고 있을리가 없었다. 결국 삼십분 넘게 기다려 열한시 반이 지나서 진료를 봤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어린이집에서 먹을 점심약을 만들고 수첩에 투약의뢰서를 쓰려는데 볼펜이 나오지 않았다. 신경질이 났다. 가방에 그냥 때려넣고 십분 거리를 부산가듯 열심히 가고 있는데, 조용하던 점식이가 한마디 했다.
-
엄마, 이거 열어도 돼?
-
뭐?
-
돌아봤을 땐 이미 찰박거리는 물약통 뚜껑이 열린 채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걸 열면 어떻게 해?!' 하고 락커 버금가게 샤우팅을 해댔다. (내 동생은 이럴 때의 나를 익룡 같다고 표현한다)
어린이집 앞에 주차를 하고 점식이를 보니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도 안내고 울고 있었다.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소리 질러서 미안해.
-
대충 사과를 했다. 점식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결된 줄 알았다. 뒤끝이 없는 편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열두시였다. 점심을 한참 먹고 있을 시간이었고 빨리 들여보내야했다. 선생님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았지만 집에서 점심 먹이며 씨름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등원 시키는데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께 '방금 저한테 많이 혼났어요' 라고 정보를 드렸다. 점식이는 인사도 하지 않고 쏙 들어가 버렸다. 뭐야. 자식. 조금 서운했다.
다시 차로 돌아와 앉았는데, 손바닥 뒤집듯 방금 전까지 없었던 죄책감이라는게 엄습했다.
예민해질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차라리 오늘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걸. 지각이 뭐 대수라고. 수첩 못쓴 게 뭐 큰 잘못이라고 괜한 애를 잡았나 싶었다.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저녁에 맛있는 걸 해주기로 결심했다. 마트를 걷고 있는데 아내를 때리고 선물로 해결하려는 남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짜 더러운 기분이었다. 억울하고 속상한 표정으로 원에 들어가던 아이의 표정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낮잠 시간 즈음, 원장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점식이가 기분이 안좋다며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간식도 안먹고 종일 누워서 지내고 있다며 일찍 데려가시는 게 좋겠다는 걱정담긴 전화였다. 마음이 덜컹거렸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나한테 마음이 상해있으니 집에 오기 싫은 건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선생님께 부탁해 집에 일찍 가고 싶은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다행히 그러겠다고 해서 일찍 하원하기로 하고 데리러가는 오분 남짓의 시간 동안 열심히 사과하겠다고 다짐했다. 최대한 마음을 풀어주리라고.
점식이는 생각보다 양호한 기분이었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지도 웃지도 않았지만, 이정도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마음 상해있었던 적은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 엄마가 화내서 많이 속상했어?
- 응.
- 미안해. 아까 미안하다고 했을 때 알았다고 해서 엄마는 괜찮은 줄 알았어. 많이 속상했는 줄 몰랐어. 소리질러서 정말정말 미안해.
-(끄덕)
- 집에 가서 코코아 먹을래?
- 엄마는 커피 먹을거야?
- 그래.
- 그럼 커피집에 가서 사먹자.
- (헐) 코코아 사주면 밝고 씩씩한 점식이로 돌아올거야?
- 응.
- 네, 해야지.
- 네.


나는 동네 커피집에 9,200원을 내고 커피와 코코아를 받아서 집에 돌아 왔다(집에서 마실거면 왜 사먹자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각자 음료를 앞에 놓고 화해했고, 점식이는 어린이집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으며, 코코아를 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티비장 앞에서 몽땅 엎질렀다. 티비장 아래로 코코아가 스며들었고 소파 앞에 깔아놓은 매트와 전기장판이 코코아로 얼룩졌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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