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식 Apr 25. 2024

아무도 모르지만, 가출

21분 동안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왔다. 오전에 비가 내린 뒤 종일 해가 뜨지 않아서인지 제법 쌀쌀했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발끝을 아파트 밖으로 돌렸다. 충동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1층으로 쓰레기를 버리러 갈 뿐인데 도톰한 외투를 목 끝까지 여미고 나오진 않으니까.

손에 들려있는 장바구니 세 개를 하나로 합쳤다. 가장 큰 일반 플라스틱용 연두색 가방 안에 생수병용과 캔&스티로폼용 재활용품을 담는 가방을 집어넣었다. 내려올 때보다 더 커진 가방이 공기처럼 가벼웠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바깥길을 걸었다. 꽃이 떨어지고 난 뒤 나무들은 빠르게 연두색 이파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저 얇은 가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토록 많은 잎이 뽑아져 나온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가로등 빛에 새로 돋은 연두색 이파리들이 빛났다. 지금이 딱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 같은 파릇파릇함. 녹음이 짙어지고 무성해지면 어쩐지 여드름이 온 얼굴을 덮고 자고 일어날 때마다 부쩍부쩍 크는 청소년 같아 징그러웠다.


집에서 점점 멀어졌다. 집에 혼자 있는 아이에게 곧 전화가 오겠지. 발걸음이 바빠졌다. 전화가 오기 전에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야 돌아가는 길이 길어질 테니까. 갱년기가 시작된 뒤로 추위와 더위를 동시에 느끼는 건 견딜만해도 밤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참기 어려웠다. 고요한 새벽에 베란다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는데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내달리듯 걸어 서점에 들어갔다. 아무 책이나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아무 글자나 읽어내리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여기는 나에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을 방공호 같았다.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가출을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책을 덮었다. 표지에 유에프오가 그려져 있었다. 


서점 밖으로 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어디선가 라일락 향이 났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라일락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스마일 오키도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