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한 명을 키우면서 내 인생에는 그저 아이 한 명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생겨났다. 그 세계는 단순히 내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을 발하기를 바라는 세계이고, 혼자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많은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질 미래이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빠가 전설의 고향을 볼 때 너무 무서운데 아빠 옆에는 붙어 있고 싶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아빠 끝났어? 하고 이불속에서 물어보면 아빠는 끝났다는 뜻으로 불록 솟은 이불을 툭툭 쳐 신호를 주었다. 초등학교 때 혼자 길을 걸을 때엔 대낮에도 홍콩할머니가 말을 걸까 봐 뒤도 못 돌아보고 잰걸음으로 걷다 내 발걸음에 내가 무서워져 뜀박질로 집에 들어가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한 번 겁쟁이는 영원한 겁쟁이인 걸 증명하며 남자친구가 ‘박물관이 살아있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데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게 왜 살아있냐’며 무서워서 못 보겠다고 도망을 쳤다. 결혼하고 나서도 공포영화는 전혀 보지 못했다. 내가 가진 겁은 보이지 않는 존재,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이를 십 년 넘게 키우면서 나는 여전히 겁쟁이지만, 두려워하는 대상은 달라졌다. 다른 사람이 되었나 싶게 나는 이제 귀신이 무섭지 않다. 밤에 혼자 공포 영화를 보고, 더 자극적인 스릴러 드라마를 찾아보고, 심지어 무속 신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을 흘릴 지경에 이르렀다. 십 년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귀신 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고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녹아가는 빙하가 오염된 환경에서 오는 질병이 전쟁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귀신 보다 더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다.
아이와 바다에 놀러 갔는데 해변에 깨진 유리병과 버려진 컵라면 용기가 산재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 둥둥 떠다녔다. 바닷물이 아이 입으로 들어갈까 봐, 유리조각이 아이 발에 박힐까 봐 무서웠다. 두려움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이가 깨끗한 자연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어도 나 한 사람만큼의 쓰레기는 줄이고 싶었다. 재활용에 진심이 된 건 그래서이다.
<알맹상점>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즈음 서울환경연합에서 생수병 등 플라스틱 음료병의 뚜껑을 모아 재활용을 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참새 클럽’이라는 이름이었고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오면 잘게 분해해 다른 물건으로 재생산했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생수병뚜껑을 모아 통에 담았다. 사탕 박스 안에 가득 담긴 병뚜껑이 튜브 짜개로 재생산되어 우리에게 돌아왔고 여전히 아이의 치약에 꽂혀있다. 오늘 다시 가득 찬 통을 들고 이제는 알맹상점이 된 재활용센터에 다녀왔다. 플라스틱 뚜껑을 색깔 별로 분류해서 재활용 박스에 넣고, 집에서 챙겨간 빈 생수병 하나에는 새 세탁 세제를 가득 채웠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세제’라는 귀여운 이름이었고 가격은 상상 이상으로 착했다. 알맹상점 서울역지점은 곧 문을 닫지만 망원점은 꾸준히 자리를 지킬 것이고 작은 노력들이 모여 변화를 만들 거라 믿는다.
<한살림 우유팩 재활용>
우유를 많이 먹으면 키가 쑥쑥 자란다고 믿는 남편은 아이에게 매일 빼놓지 않고 우유를 마시면 용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덜컥했다. 원래도 우유를 좋아하는 아이인데 실컷 먹을 명분이 생겼으니 아이는 신나게 우유를 마시고 있다. 돈까지 받으면서. 아이가 우유를 많이 마시니 그만큼 우유 용기도 많이 나왔다. 종이 팩과 멸균 팩이 일주일에도 두어 개씩 쌓여서 자르고 씻고 말리는 것도 사실 굉장히 귀찮은 일 중 하나다. 그래도 매번 열심히 한다. 깨끗이 씻고 말려서 한살림에 가지고 가면 살림포인트로 돌려준다. 간혹 재생종이로 만든 휴지로 교환해주기도 한다. 득템!
<유기견 보호소 이불 및 수건 후원>
몇 년 전부터 유기견 보호소에 이불과 수건을 후원하고 있다. 대단한 후원은 아니고 사용하던 이불과 수건들을 보낼 뿐이다. 아이가 쓰던 작은 이불과 목욕 타월은 사용 기간이 짧아서 버리기엔 아깝고 아이가 사용하던 물건이라 애틋하기도 해서 쓰레기통에 넣고 싶지 않았다. 이불 기증을 찾다 보니 유기견 보호소에 이불, 수건 등이 턱없이 부족해서 후원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르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오래되지 않았던 터라 더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 후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이불과 가정에서 쓰기엔 낡아서 교환하고 싶은 수건들 중에 깨끗한 것들을 모아놨다가 일 년에 한 번 정도 후원을 한다. 작은 도움이지만 잠시라도 아이들이 깨끗하고 따듯한 잠자리를 갖기를 바라며.
<폐의약품 약국 및 우편 회수>
영화 괴물을 보고 약을 그냥 버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산책하고 돗자리에 앉아 간식 먹으며 쉬는 아름다운 한강 고수부지에 괴물이 뛰어다니도록 할 순 없으니까. 그즈음 폐의약품은 약국에서 회수한다는 기사를 접했고 그 후 알약은 알약끼리 물약은 물약끼리 가루약은 섞지 말고, 사용기한 지난 연고 등은 그대로 약국에 갖다 주고 있다. 모든 약국이 다 받아야 하지만 받지 않는 약국도 있고 받더라도 불편하고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기도 해서 적당한 뻔뻔함이 필요했다. 하지만 작년 여름부터는 약국에서 얼굴 붉힐 필요 없이 주민센터나 보건소에서 폐의약품 회수 봉투를 받아서 우체통에 넣을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 주민센터에서 자체적으로 폐의약품을 회수하는 곳도 있지만 여전히 드물고 회수봉투를 무료로 배포하니 받아서 폐의약품을 채워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우체국에서 취합해 제약사로 돌려보낸다.
단지 내 아이에게 더 좋은 자연과 환경을 물려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고 우유팩을 자르고 텀블러를 사용하고 폐의약품을 반환하고 쓰던 물건을 재사용, 대물림 한다. 개인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미래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 이런 일이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더 많다. 병뚜껑 재활용 워크숍을 하겠다고 새 병뚜껑을 색색 별로 만들어 팔고 있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기도 하고 작은 노력은 정말 작을 뿐이구나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빈 사탕 박스에 다시 병뚜껑을 모으고 우유팩을 자르고 재활용쓰레기로 버릴 일회용기를 깨끗이 닦는다. 나 같은 이기적인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