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복 소급적용 요청의 건
시월이 시작되던 날, 우연히 사주를 보는 분이 쓰신 글을 읽게 되었다. 10월부터 기운이 바뀌니 늦어도 8일까지는 집안의 묵은 기운을 내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입춘에도 정월대보름에도 설에도 칠석에도 얼마 전 추석에도 빼먹지 않고 소원을 빌고 열심히 살았는데 자꾸 운이 비껴갔다. 아무래도 달님이 나를 깜빡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사주라는 게 운명이라는 게 믿거나 말거나 일지라도 집정리야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 다른 데 갔다 오는 운 좀 잡아보겠다고 내내 집안을 종종 거렸다. 달님에게 크게 손 흔드는 마음으로.
저 여기 있어요, 들어주셔야 하는 소원 몇 번이나 빼먹으셨어요. 따져 묻지 않을 테니 밀린 복들 소급적용 좀 부탁드릴게요. 혹시나 복 들어올 자리 없을까 봐 옷장에서 묵은 옷들 꺼내 안 입는 옷은 버리고 물려줄 옷은 따로 정리했고요, 가스레인지도 깨끗이 닦았어요. 신발장도 단정하게 정리했고요, 바닥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어요. 설거지도 마쳤고요, 쓰레기통도 비웠어요. 냉장고도 여유롭고 상한 음식도 하나 없어요. 제가 딱 하나 정리 못하고 미련 두는 건 책들 뿐인데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까 괜찮잖아요. 제가 집에 두는 것들 중에 유일하게 욕심내는 물건이니까 책은 그냥 넘어가주세요. 저 올해 애 많이 쓰고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이제 부엌에도 안방에도 거실에도 아이 방에도 현관에도 자리자리마다 복 조금씩만 놓아주세요. 세상에서 집이 제일 좋은데 집에도 못 들어오고 열심히 일하는 아범도, 이제 사춘기가 시작되려 하는 아이도, 너무 일찍 찾아와 버린 갱년기로 맥 못 추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도, 부귀영화 누리겠다는 거 아니고 대놓고 등 따시고 배부르겠다는 거 아니고 그냥 걱정 덜고 조금만 편하게 살게요.
휘영청 손 닿을 듯 커다란 슈퍼문이신 달님, 저 여기 있어요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