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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나쌤 Mar 13. 2023

외할머니 장례식 상주 명단에 내 이름만 없다

외할아버는 둘째 부인에게서 우리 엄마를 낳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장례로 친척들이 하나 둘 장례식장으로 모여들었다.  



결혼하고 10년 넘게 외갓집에 발길을 끊었다. 외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일곱이었는데, 엄마와 큰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친 자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도 친손주가 아니라 살갑게 대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친엄마가 아니었지만 엄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친자식들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외할머니를 모셨다. 외할머니의 친자식들은 경기도, 제주도로 각자 자기의 삶에 바빴다. 하지만 엄마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정성으로 모셨다.



외할머니 영정 사진을 보는데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친엄마가 아닌데도 닮을 수가 있는 걸까? 나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남편이 툭 건드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모들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과 얼굴이 퉁퉁 부어서 엄마를 잃은 딸들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까만 상복을 입은 엄마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도 슬플까? 우리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두 번째로 결혼한 부인에게 낳은 딸이다.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낳은 다섯명의 자식은 우리 엄마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이모들은 엄마를 항상 '우리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면 언니지 우리 언니는 또 뭐란 말인가? '우리 언니'가 아니라서 그렇게 강조해야 하는 건가?



어릴 때부터 외갓집에 가면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다. 어릴 때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명절에 나에게는 천 원짜리 몇 장을 주고, 다른 손주에게는 퍼런 만 원짜리 지폐를 몰래 쥐여주다 나에게 들켜서 호들갑스럽게 둘러대던 걸 보았지만 난 몰랐다. 그게 어떤 차이인지. 그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지를...



내가 중학생 때 큰 외숙모에게 내가 친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도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받았던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었구나.  



십 년 넘게 왕래가 없었던 탓에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데 만남의 장소가 하필 장례식장이라니. "어디 학교 다녀?" "어디 직장 다녀?" "올해 몇 살이야?" 사촌 동생들에게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나이를 묻고 직장과 학교를 노골적으로 묻는다. 막상 묻고도 내 질문이 참 센스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궁금해서 물은 질문이 아닌 란 걸 아는지 주저함 없이 대답한다.



사촌 오빠들과 외삼촌들은 유독 남편에게 호의적이었다.. 명절에도 외할머니에게 인사 한 번 오지 않는 나에 대해 엄마는 이런 저런 핑계로 둘러댔을 테지만 다들 짐작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외갓집에서 느꼈던 서운함과 이질감을. 그런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다들 철이 들고나니 인류애라도 생긴 것일까?



"저 이만 가 볼게요. 아이들 둘만 집에 두고 와서...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기약 없는 약속을 왜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그냥 나오는 대로 뱉어본다.



친척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장례식장 문 앞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몹시 융숭한 이런 대접이 불편하다.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외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장례식장 입구에 할머니의 빈소를 안내하는 전광판을 쳐다보았다.

고인. 박막례

상주. 박민태

자녀...

손주...

위에서부터 하나 하나 읽으며 내려가던 나의 눈이 어느 한곳에 멈췄다. 손주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 내 이름만 없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이러기야?

순간 울컥한다.



울컥은 할머니 영정 사진 앞에서 했어야지. 감정 없이 멍 때리고 서 있다가 여기서 울컥이 웬 말이야?



잠시 사진을 찍을까 생각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내가 우습게 느껴진다. 사진 찍어서 뭐 하게? 엄마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거야?



"나 이제 외갓집 안가. 나 하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걸로 부족해서 내 남편도 없는 사람이야? 난 엄마랑 달라서 그것까지 참기 싫어. 굳이 반기지도 않는 외갓집 안 갈래. 그냥 예의 없는 애라고 욕먹고 말지 뭐."

엄마의 어떤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도 어느 순간 그런 나를 포기했다.



없는 사람 맞네.

그러니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걸로.

그렇게 쿨하게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난 쿨하게 돌아서 남편과 장례식 장을 나왔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몇 번이나 전광판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거기에 내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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