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침대 위엔 한 까치의 담배와 짧은 글만이 남겨졌다.
“배냇저고리를 대신할 담배 한 까치“
진득해진 피부는 캐러멜 맛이 난다. 담배연기와 사이키 조명에 정신이 아득하다. 그는 날 거칠게 잡고선 클럽 밖으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클럽의 입구 옆 골목은 당장 쥐새끼 몇 마리가 눈알을 붉혀도 이상할 것 없는 너저분한 쓰레기 더미가 있었고, 무책임하게 쌓인 싸구려 술 박스들 뒤로는 나름 아늑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사실 댄스홀에서부터 흘끔거리긴 했었다. 그의 어깨나 가슴팍 따위가 얼마나 단단할지, 엉덩이는 얼마나 각져있을지 대충 예상을 하긴 했지만, 풀어헤친 검정 셔츠 안으로 만자 목걸이가(불교신자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멋으로 한 건지 모를) 땀범벅의 가슴골 사이 찰싹 붙어있고, 그 뒤로 보이는 근육은 나의 예상보다 한껏 더 풍만한 꼴이었다.
습하고 서늘하면서도 후덥한 것이, 기온 탓인지 취기 탓인지 헷갈릴 때 땀이 머리카락으로 그린 그림은, 내 얼굴 언저리나 쇄골까지 퍼져있었다. 그림을 핥아 가슴까지 내려온 그의 손은 이윽고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치 원숭이 마냥 웃긴 포즈로, 부풀어 오른 청바지를 들이대며 부비적부비적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위아래로 비벼댔다.
그때였다 이상함을 감지한 것이. 분명히 물리적인 압각은 느껴지지만 소위 ’ 좋다’라는 느낌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감흥이 없던 것이다. 머릿속에는 ’ 운동 에너지’나 ’ 접촉 자극에 의한’ 따위의 문구가 떠오르는 것부터가 뭔가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 그렇다. 허리가 없어졌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어째 거짓말 같지만 요컨대 허리가 사라진 것이다. 배꼽 아래부터 골반뼈까지 반뼘 남짓한 그 구간이 사라져 텅 비어 있던 것이다. 내 허리가? 사라졌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분명히 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지우개에게 허리를 빼앗긴 도화지 속 여자일 뿐이다. 투명해진 건지 없어진 건지 확인해 보기 위해 손도 휘휘 넣어보고 허리띠도 통과시켜 본다. 투명해진 건 아니군. 단순히 김밥 허리를 누가 쏙 빼먹은 모양과도 같았다. 혹시 단면은 어떨까? 생각했다. 단면을 바라보니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살색인 듯 검은색인 듯 또는 내장기관이 보이는 듯 검붉은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손을 집어넣어 보고 싶은 파란 모래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음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하며 즉시 침대 옆 먹다 남은 과자를 씹었다. 맛도 있고 식도의 연동작용도 느껴지고 꽤나 만족스러운듯했으나 포만감은 없었다. 이거 이거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포만감을 못 느끼니 그 어떤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별로 땅기지 않는 것이었다. ’ 배를 채우다’라는 목적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이 사실 별 의미가 없던 것일까? 엇, 또 이런 생각을 하다니.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사고 회로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중요한 면접이 있다. 잘만 하면 그럭저럭 겉모양새가 그럴듯한 회사에서 사무 일이나 보다가 대충 시집이나 가서 평범히 살 수 있으리. 자주 손이 가는 크롭티에 가죽 재킷을 걸쳤다. 참! 이 옷은 안 되겠구나. 허리를 가릴 수 있는 긴 티로 갈아입고 다시 가죽 재킷을 걸친다. 면접엔 역시 섹시함을 어필하는 것이 먹히지. 얼빠진 표정이 좀 문제 이긴 하지만 허리도 없어진 상태 일 진대 뭐가 중하리.
외출 전엔 늘 화장실에 들린다. 물론 허리가 없어진 뒤로 배변활동도 멈췄으나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들렀다. 역시나 배설할 것이 없다. 정말 제일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이다. 더러운 배설물들을 안 봐도 된다는 것! 참... 그러고 보니 포만감이나 배변욕, 성욕 등 많은 걸 잃었지만 절대적으로 만족한다. 음식에 쓰는 비용, 시간, 배변이나 성적인 활동의 비 위생적인 것과 귀찮음 등……. 종종 생각했었다. 내가 사물이 아닐까. 아, 아니 사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옷장 안의 옷걸이나 가죽 재킷 따위의 뭐, 그런 것들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동경했다. 월세는 두 달 치가 밀렸고 뜨신 물은 안 나오고 담배는 단 세 까치가 남았다. 변기에 너무 오래 앉아있었다. 이런 이런 면접은 물 건너가 버렸군.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_그것도 변기 위에서 말이지_ 면접을 놓쳐 버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무엇인가로부터 인하여 면접 따위는 뒷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 무엇인가’의 존재는 나를 천천히 옭아매며 감싸 안고 쓰다듬었다. 그 어떤 욕구보다 나의 실체를 흔들었으며 한없이 채우고 싶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욕구를 넘어선 ’ 희망’이었다. 공허해진 손끝엔 마지막 남은 담배 세 까치 중 한 까치가 쥐어졌고 타이머를 작동하듯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는 이미 쩔어있는 화장실 벽을 타고 올라가 공간을 에워쌌고 의례적으로 변기물을 내렸다.
침대 위 너부러진 옷걸이와 뒤집어진 크롭티를 지나치며 거울을 응시했다. 꽤나 봐줄 만한 용모와 늘씬한 몸매 그리고 없어진 허리, 그 뒤로 교만함에 우쭐하여 방탕한 섹스 후 식탐을 부리며 남을 시기하는 나의 잔상들이 지나쳐 갔다. 거울 속엔 나태한 모습에 조소 어린 표정의 노파가 서있었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시 침대 위에 털썩 앉아 네일아트를 한 손톱 뒤에 숨겨진 때를 긁어냈다. 옆으로 너부러진 옷걸이와 뒤집어진 크롭 티가 눈에 띈 건 그때였다. 문득 수첩과 샤프를 꺼내 들었다. 깨끗해진 손톱은 ’ 희망’의 존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담배의 필터가 뜨거워질 때쯤 샤프를 놓았다.
저것들과 비슷하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저것들처럼 되고 싶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옷걸이나 크롭티 쪼가리 말이다. 마치 멋진 영화를 보고 그 주인공에 빙의하는 것 마냥 처참한 현실도피일까 아니, 희망이다.
희망을 위해 옷장에 들어갔다. 허리 아래의 것을 옷걸이에 걸고 위의 것은 바닥에 눕혀. 물론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나는 희망이 되었다.
침대 위엔 한 까치의 담배와 짧은 글만이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