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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Jan 23. 2023

담배를 빌리는 것에 대하여

단편소설

재우 씨가 다니는 회사는 실적을 스티커 따위로 체크하는 주먹구구식 운영을 하는 곳이 절대 아닐뿐더러, 심지어 ’그’ 계열의 회사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입자 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재우 씨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 지역 사람이라면 나도 알고 있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역 방송 광고에 하루 죈종일 나오기 때문인 점이 가장 크다.

무언가를 제조하고 유통까지 하긴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수익창출 측면에서 봤을 때 물을 팔던 흙을 팔던 잘 팔리기만 그뿐이지, 요컨대 월급만 제때제때 주면 그뿐이라고 재우 씨는 말한다.


 재우 씨는 회사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업무의 특성상 재미난 일이 다분히 생기는 편이어서 그런 일화들을 잘 모아 두었다가 한 번씩 주르륵 시간순으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요약정리하여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대부분은 정사각형의 포스트잇에 사건의 포인트만 적어와서 설명을 했고 내용이 방대할 땐 아예 파워포인트로 프레젠테이션을 펼치기도 한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데이트 중 2~3시간을 뺏겨버린다.

지나치게 꼼꼼해서 어째 바보 같기도 한데 난 재우 씨의 그런 면이 좋다. 이렇게 열심히도 재미난(과연 재미의 의미를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야기들을 병적이리만치 열심히 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사귀기 초반이었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재미없는 이야기임에도 아주 웃기다는 듯이 깔깔깔 웃으며 거짓 반응을 보여줬던 것 때문이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기에 그런 바보스럽게 우직한 모습은 더욱 신뢰를 준다.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가 된 것은 1년 전부터이고 알고 지낸 건 10년이 넘는다. 그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재우 씨는 단 한 번의 사건 사고 없이 모범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다. 굳이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담배를 피운다는 건데, 2세를 위해 언젠가는 끊게 만들어야 하니 나는 늘 기회를 벼르고 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 딱 5일 만에 하는 데이트 날이었다. 서울대병원 정문 근처 공원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재우 씨의 손엔 담배와 휴대폰과 지갑과 차 키가 들려있는데 이미 담배 한 까치는 입에 물고 있었다. 담배를 문 입으로 우물거리며 다짜고짜 앞도 뒤도 없는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이 무슨 80년대도 아니고 실적 스티커를 붙여 놓는 게 말이 되냐고 쪽팔리게”


"웬 스티커? 어린애들 칭찬 스티커 같은 그런 거 말이야?? “


”그래, ’ 그걸’ 팔아서 회원을 유치할 때마다 회색 스티커를 한 개씩 붙여 올라가는 거야. 그거 정말 스트레스거든, 스티커가 주춤할 땐 뭔가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사람 돌아버리겠더라고. “


재우 씨는 이어서 말했다.


”그놈의 회색 스티커 참나원, 아무튼 우리 회사 대단해 “


’그’ 회사의 업무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이지만 진짜 일의 시작은 10시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나서이다. 회사에 여자는 인사부나 경리부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자들뿐이다. 그리고 대부분 흡연자들이다. 흡연 구역은 옥상에 마련돼 있는데 건물이 4층까지 뿐이라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계단 두세 개씩을 성큼성큼 올라 다닌다. 담배를 피우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이미 담배를 입에 문채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3층 계단을 돌아 올라가는 곳에서부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덕분에 회사 건물 2~3층부터 이미 담배 냄새가 은은히 배어 있다. 공공연하게 장난스러운 이야기가 있는데, 그 회사 건물을 약 1킬로가량 멀리서 보면 버섯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만들어지는 상승기류로 인해 보이는 버섯구름과 똑같이 생겼다는 소문이 있다. 회색 버섯 건물이란 별명도 있는데 아쉽게도 나는 딱히 확인해 본 적이 없다.


재우 씨는 담배를 피우던 동료들과 스티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회색 스티커 얼마나 모았어? “라고 재우 씨가 최 대리에게 물었다.


 “몰라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보지도 않고 있단 말이지 “라고 한숨 섞인 대답을 하는 최 대리이다.


“자네 그런 무신경함이 난 부럽더라, 근데 우리가 회색 스티커를 언제부터 시작했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참, 나 이번에 이상한 경험을 했다니까? 아니 글쎄 갑자기 내가 뭘 팔고 있는지 생각이 안 나더라고 “


“어허이 젊은 나이에 건망증이 심하네 “


“자네는 뭘 파는지 기억이 나는가? “


“난 잊고 산지 오래야, 뭘 팔던 어때. 다들 이러고 사는 거지. 인생이란 뭐랄까? 코가 막힌 상태로 초밥을 먹는 거랄까 혹은 회색깔 비빔밥을 먹는 거랄까? “라고 말하는 최 대리의 표정이 담담하기만 했다.


최 대리는 점심에 결국 초밥을 먹으러 갔다고 재우 씨는 피식거리며 말해주었다.


업무 시작 전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졌던 그들은 전에 없던 궁금증이 생겨버린 탓에 다들 줄담배를 피웠고 와중에 재우 씨는 담배가 똑 떨어져 버려서 최 대리에게 한 까치를 빌렸다.

흡연자들끼리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한다. 우선 담배를 빌린다는 게 참 재미있는 표현인 것이다. 사실상 갚을 것도 아니면서 빌린다는 말을 하니 말이다. 빌려주는 쪽도 돌려받을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고 실제로 한 까치를 다시 갚는다고 해도 약간의 헛웃음 비슷한 것과 함께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일명 돛대라고 불리는 마지막 한 까치 남은 담배에 대해서는 서로 정중히 존중해 주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룰을 미루어 보아 흡연자들끼리의 연대감은 꽤나 깊을 것이다.


빌린 담배를 다 피워갈 무렵 재우 씨 무리의 스티커에 관한 이야기도 점점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아, 혹시 자네 담배 몇 갑씩 놔뒀어? 아예 한 갑을 빌려주면 점심때 사서 줄게 좀 빌려줘”


“아, 어제 두 보루나 사다 놔서 많아. 굳이 안 사다 줘도 돼. 차라리 스티커로 갚는 건 어때. 하하 하하”


“좋지, 아주 좋지,

담배 정도면 스티커와의 등가교환이 충분히 가능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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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를 빌리는 것에 대하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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