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마포역 1번 출구 바로 앞 편의점,
편의점 앞 횡단보도 4차선 도로를 건너면 보이는 모던 빠.
막내 바텐더로 일한 지 2년째이다. ’ 막내’는 참으로 좋은 직급이다. 아주 충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적당한 수준을 웃도는 페이를 받고 있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 적당한 수준의 페이에 비해 내가 하는 일은 지극히도 ’ 막내’의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무책임감은 내 생활의 원동력이다.
역에서 나와 길을 건너기 전, 편의점에 들러 말보로 라이트 하나, 흰 우유 900미리짜리 하나를 사는 것이 업무의 시작이다.
내가 출근하는 시간, 그러니까 오후 6시에는 항상 후드가 달린 티를 입는 알바생이 있는데, 분명히 한 번쯤은 싸우자는 태도가 다분히 보이는 공격적인 말투로 “봉투 드려요? “라고 항시 똑같이 물어본다. 어째 야비해 보여서 나 자신이 께름칙하지만 난 주로 아무 대답도 안 하거나 혹은 그냥 카드를 약간 던지듯이 내려놓거나 또는 “됐어.... “라고 반말인 듯 반말 아닌 듯 끝을 흐리면서 답한다.
우유를 옆구리에 끼고 담배를 잘 챙겨 편의점을 나올 때, 단 한 가지 상쾌한 점은 강화도어 출입문 끝에 위태롭게 달린 종소리가 아주 맑다는 것이다.
빠는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5층짜리 건물의 2층에 있다. 이 동네 노른자 구역 중에서도 가장 알짜배기 건물이라는 점이 당연히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한 가치는 빠의 사장이 건물주라는 점이다. 알만한 대기업 임원으로 정년퇴직을 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변태 한량 노인네. 다만 그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좀 흥미로웠다. 뭐,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론 괜한 사회 탓을 하는 나의 너덜한 결점을 드러냈던 기억이 난다.
엘리베이터는 뒤로하고 2층 정도는 그냥 걷는 게 낫다. 검은색 대리석 계단에 또각또각 내 구두 소리가 입혀지면 어딘가 드러내기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마치 공주가 된 느낌이다. 아마도 그렇다. 유년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공주들이 나오는 만화영화를 꼭 틀어줬었는데, 하늘빛 드레스를 입고 유리구두를 신은 어떤 여성의 모습이 강렬히도 뇌리에 남아있기에 이딴 말도 안 되는 ’ 공주’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라 확신한다.
커다란 방화문을 열면 차분한 그레이컬러의 코팅이 된 디자인 유리문이 또 나온다. 방화문은 최대한 벽으로 붙여 활짝 열어두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특유의 술 냄새와 바닐라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흐른다. 그 향은 배가 부른듯한 느낌을 준다. 내가 늘 입맛이 없는 이유가 바닐라 머스크 향 덕분인 거라면 당장에 삼보일배라도 해야 할 판이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적어도 먹는 것엔 욕심이 없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적잖이 서글픈 상황 속에서도 적당한 피식거림으로 그 상황을 피하는 방법은 ’ 실제로 삼보일배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 상상하기’이며 이것은 때아닌 행운이다.
조명도 올리기 전, 빠부터 들어가 하부 냉장고에 우유를 넣는다. 우유는 여자 손님들 때문에 준비해 놓는다. 왜 여자들은 야심한 시간에 빠까지 와서 ’ 전 취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반드시 곁들이며,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걸까. 요컨대 가장 확실한 것은 여자들끼리만 오는 테이블에선 절대 우유 주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간혹 가다 깔루아 밀크라든지 베일리스 밀크 따위의 칵테일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 같은 부류의 여자들이다. ’그 여자들이 평소와 같이 위스키를 들이켜 준다면 내 인센티브에도 도움이 꽤나 될 텐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나도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나 쉬어대며 담배를 문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청소를 하고 간판과 각종 수많은 조명을 살피고 테이블과 룸과 빠의 곳곳에 양초까지 켜두면 귀찮은 일은 거의 끝이 난다. 어두운 조명에서 조금이나마 돋보일까 하는 바람으로 화장을 고친 후 다시 담배를 물때쯤이면 7시이고, 7시면 소위 ’ 양주 오빠’라 불리는 주류회사 배달원이 온다.
“쪼니 블루 두 개, 블랙 다섯 개, 발렌 원투 각각 세 개, 글렌 열여덟 개.... “ 양주 오빠는 주문서를 읽으며 술을 내리고 나서 문제없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오케이, 맞아요. “라고 주문서를 보며 나는 대답했다.
“어제 많이도 팔았네. 다들 기어서 퇴근한 거 아냐? “
“퇴근은 늘 신나지. 기는 건 다음날 출근 때 아냐 오빠? “라고 나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대답했다.
저런 일을 하는 남자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물었다.
곧 언니들이 출근하고 8시쯤 되면 손님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장사 준비의 마지막 단계는 재즈를 트는 것이다. 난 재즈에는 일가견이 없다. 한 번은 빠에 홀로 앉아 진한 향의 몰트위스키 종류를 마시던 손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맨해튼의 새벽 거리를 걷는 기분이 들어요. 료 씨는 어때요?”라고 말하면서 나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나는 얼음이 녹아 있는 손님의 잔은 빠르게 치워 버리고 다시 언더락을 만들어 건네주며 말했다.
“전 제 고향 오사카의 시텐노지 사찰이 생각나요. 왜냐면 뉴욕의 새벽과 닮았거든요. “
나의 주특기다. 모든 이야기에 은근히 내 고향 이야기를 넣어서 화제를 돌리는 것이다. 남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내 고향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 재즈음악을 틀고 언니들이 모두 출근을 하고 8시가 되면 나의 주특기를 펼치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타국에서 온 여자에게는 늘 궁금한 것이 많다. 열중에 여덟은 이런 질문을 한다.
“아, 그럼 료 씨, 이름이 가명이 아니라 혹시?”
“네 료 마키사. 제 본명이에요.”
또한 남자들은 이런 여성에게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술을 사주는 법칙이 있다. 이것은 최대한 비싼 술을 팔아서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 유일한 재미인 나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비밀 병기이다. 또한 재즈 따위의 피곤한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술을 한 잔 받고 나면 살짝 옆으로 돌아서 전면 통유리로 된 벽 너머를 바라본다. 여의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확인하는 걸 좋아한다. 불빛이 한강에 녹아 잔잔히 굴러다닌다. 그 앞으로 조금만 더 눈을 돌리면 편의점이 보인다. 편의점 옆 에어컨 실외기에 기댄 후드티의 알바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난 손님과의 대화 중에도 자꾸 그곳을 보게 되었다. 알바생은 깡통에 담배를 꾸겨 버리고선 다시 편의점 문을 열다가 문득 멍하니 섰다. 문 끝, 위태롭게 달려있는 종을 이리저리 만지고 나서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나는 손님에게 잠시 담배를 태우고 오겠다고 말했다. 웬만한 빠에서 바텐더와 손님이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곳처럼 격식과 재즈가 어우러진 모던 빠에서는 그런 건 예의가 아니라며, 담배는 창고 뒤 구석진 곳 환풍기 앞에 쭈그려 앉아 핀다.
오래 서있어서 경직된 허리를 풀어주며 맑은 종소리를 떠올렸다. 후드티를 입은 알바생과 키스하는 느낌을 상상해 봤다. 커다란 체격에 손이 큰 알바생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순간 머리를 절레 거리며 이 상상이 실현되는 것만큼 구역질 나는 일은 생길 수가 없을 거라는 확신을 했다.
그때의 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었다. 어떤 의지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오리무중 일 수밖에 없는 키스를 해버렸다. 온도를 느끼기도 힘들 정도의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말랑말랑한 그의 입술에서는 위스키의 진한 향이 퍼졌고 이제 그와는 료 씨와 손님이 아닌, 그렇다고 연인도 아닌 그 중간 단계이다. 그 사람은 내 생일 선물로 유리구두를 선물해 주었다.
오늘 나는 유리구두를 신고 서툰 운전 솜씨로 마포역을 지나며 그 편의점을 쳐다봤다. 혹시 후드티의 알바생이랑 키스를 했어야 했을까?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