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굳이,
결국에는.
이름을 써버리고 마는 그녀였습니다.
“ 에이.... 거 참 하지 말래두“ 저는 그녀에게 핀잔을 주며 말했습니다.
“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그 말 참 멋져요? 그죠? “ 저의 나무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신이 난 그녀입니다.
사실 문화재에 이름을 쓴다든지 날짜를 쓴다든지, 내용을 막론하고 여하튼 간에, 낙서를 하는 행동은 용인받기 어려운 몰상식한 짓입니다. 저는 도덕적 의식 수준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약간의 허례가 있는 편이라 누군가가 그녀의 행동을 볼까 걱정입니다. 함께 있는 저까지 싸잡아 욕을 먹게 될 테니까요.
허나, 이 정도의 께름칙함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녀입니다. 그녀는 저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외모와 몸매를 소유했음에도 저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며 심지어 더치페이도 할 줄 아는 이 시대의 신여성입니다. 아직은 완벽한 연인 사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곧 깊은 사이가 되고 자연스레 결혼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 예정입니다.
“여행 오길 정말 잘했다. 그죠."라며 환하게 웃는 그녀입니다.
“그러게. 좀 무리하긴 했지만 멀리 나오니 좋네. 근데요 그래서요. 님아, 석탑에 이름은 잘 썼어요? “
저는 장난을 빙자해 그녀를 탓하는 말을 했습니다.
“네! 돌로 박박 긁어서 새겼어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
그녀의 미소는 태양만큼이나 밝습니다. 좋은 듯 찌푸려지는 괴칙한 미소가 지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기묘한 ’ 밝음’입니다.
돌이켜 보니 이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만 해도 귀여움 정도로 치부하고 넘겨 버릴 수 있는 작은 단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만남을 더해 갈수록 이건 마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떠한 공기 중 물질에 중독된 것처럼 점점 그 증세가 심해져만 갔습니다. 혹여나 병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근심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비단 문화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 돌’만 보면 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비정상적인 상태로 돌변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겨야만 하는 병에 걸린 상태였던 겁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스톤 싸인 증후군이랄까, 혹여나 제가 이 병의 첫 발견자가 될 수도 있으니 이름 짓기에 더욱 신중해야겠으나 아무래도 스톤 싸인 증후군만큼 적확한 병명이 없습니다.
물론 괴칙한 ’ 밝음’도 늘 함께 합니다.
관악산 연주암 벽, 지리산 흔들바위, 제주 동 방파제 테트라포드, 성북동의 길상사 석탑 등등.... 모든 곳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 어릴 적, 아빠의 동창이 놀러 왔어요. 집에.
아저씨는 가방을 들고 왔어요. 갈색 가죽 가방.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아저씨의 가방을 뒤지며 놀았어요. 아저씨와 아빠는 그런 저를 쳐다보며 웃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의 가방 속엔 작은 세상이 들어있었어요. 잔뜩 납작해져 버린 담뱃갑의 주둥이에선 갈색 부스러기가 우악스럽게 터져 나와 있었고 10원짜리 동전들도 함께 버무려져 있었어요. ”
그녀는 까딱까딱 고갯짓을 하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아저씨와 아빠는 한참을 얘기했고 온 집안은 어느새 담배 연기로 가득 찼어요. 더 이상은 연기조차 발 디딜 틈 없을 때쯤 아저씨는 ‘아이쿠,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구먼. 원단시장에도 들러야 되는데 이거 늦겠다 늦겠어.’ 하며 서둘러 자리를 털었어요. 현관문을 여는 순간 담배연기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로 터져 나갔었죠. 자지러지게 웃으며 서로의 눈길을 느끼며 조잘거리던 연기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흩어지고 공기 중에 분해되어 하릴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거죠. 나로서는 이런 심상치 않은 슬픔은 처음이라 이건 마치 슬픔이 아닌 재앙과도 같았어요. 그런 비극적인 이별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만 했기에 재빠르게 아저씨의 구두인지 운동화인지 구별이 잘 안 가는 신발을 제 책상 서랍에 넣어 버렸어요. 헤어짐에 슬퍼져 버린 연기들은 차곡차곡 접힌 채로 서랍 속 추억이 된 양 아니,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양 잠자코 서랍의 한자리를 차지했죠. “
반쯤 식은 커피는 그녀의 입으로 호로록 들어가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그녀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마신 커피는 그녀의 몸을 돌고 돌아 다시 그녀의 입으로 튀어나왔고 그것이 그림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선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빠는 동창에게 미안하다며 신발을 내주었고 아저씨는 껄껄껄 웃으며 신발을 신었어요. 그러면서 저를 보며 말했어요. ’곧 다시 놀러 오겠다고.‘ 근데 그 아저씨는 다시는 오지 않으셨어요. “
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 확신하건대 제 이름은 외로움 때문에 생겼어요. 혹시요, 돌에 새겨진 제 이름은 변하지 않을까요?”
라고 테이블 쪽으로 가슴을 당기며 격양된 듯한 표정으로 질문까지 쏟아냈습니다. 전 다소 멍한 기분으로 최선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네.”
“네, 중요한 이야기죠.”
“혹시 말이야. 담배 연기들이 조잘거렸다는 그 부분은 추상적 표현인 거야, 아니면 실제로 눈에 보인 현실의 광경이었던 거야?
“그건 현실이었어요"
“단순히 기억으로만 남아 버린 그 말 많은 담배 연기는 현실이 아니야. 당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해요. ”
“왜요?”
“글쎄,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
그녀는 가방에서 말보로와 라이터와 지갑을 꺼냈습니다. 담배 한 개비를 물더니 불은 붙이지 않은 채로 지갑에서 5,800원을 꺼냈습니다. 천 원짜리 5장과 500원짜리 동전 하나, 100원짜리 동전 3개. 조심스럽게 정리하여 제 앞에 놓아두며 말했습니다.
’‘제 커피값 이에요”
그때 그녀를, 쫓아 나가야 했었을까요? 그녀는 지금도 어디선가 단단해 보이는 돌에 이름을 새기고 있을까요? 거참.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