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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Feb 26. 2024

어느 ​스킨답서스 인간의 인터뷰

단편소설

 두 달째 연락이 안 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입이라 해도(어쩌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요) 연락 하나 없이 두 달이나 사라져 버리는, 그런 책임감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걱정과 궁금함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출발했습니다.

 집까지 오는 길은 꽤나 복잡했어요.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탔고 마을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으며 그 뒤로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미로같이 복잡하고 좁은 길이 어찌나 끊임없이 이어지던지….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이거 너무 복잡한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하고요. 그녀의 주소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부터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 좁아졌습니다. 온몸의 호흡을 빼고 잔뜩 움츠린 채로 옆으로 걷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정쩡한 꽃게 걸음은 어째 바보스럽지만 요컨대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실로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녀의 집 대문은 9살짜리 꼬마 아이 하나가 겨우 들락거릴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알루미늄 쪽문이었습니다. 시건장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이 부분은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녀다웠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2교대 공장, 그러니까 냉장고 부품을 만드는 아주 작은 공장에는 직원들이 쓰는 철제 사물함이 주르륵 놓여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탈의실이자 휴게실이자 식당입니다. 워낙에 손버릇 나쁜 치들이 들끓기에 사물함엔 모두가 커다란 자물쇠를 달아 놓고 사용하죠. 그러나 그녀는 자물쇠를 여닫기가 귀찮다며 문을 열어두고 다녔습니다. 뭐, 훔쳐 갈 물건이 없었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훔쳐 갈 것이 있든 없든 간에 그녀는 문을 열어두고 다녔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는 답답하거나 귀찮은 것을 아주 싫어했고 덕분에 저는 그녀의 집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죠.

 전 문을 열기 전에 우선 물부터 마셔야 했습니다. 그녀의 집까지 오는 길이 너무 고된 탓이었을까요. 목이 쩍쩍 달라붙을 것만 같은 건조함을 느꼈고 겨우 입안을 돌고 있는 침에서는 피 맛도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백팩에 있던 500밀리짜리 생수병을 급히 열다가 뚜껑을 바닥에 떨어뜨렸으나 몸을 굽혀 뚜껑을 주울만한 틈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납작하고 가늘고 작은 골목길의 알루미늄 문 앞 공간이었습니다. 뚜껑 따위는 포기한 채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습니다. 벌컥벌컥 소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크게 들려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목이 말랐던 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만 했고 물이 몸 안에 퍼 질수록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그 어떤 소리도 냄새도 온도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빽빽한 공간 속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공간은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순수해서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 순수의 공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500밀리미터의 물은 몇 초 만에 사라져 버렸고, 안타깝게도 공간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귀가 뻥하고 트이면서 탁했던 시야도 뚜렷해졌기에 그제야 공간이 사라졌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쉬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쉬운 감정 탓에 아스라이 조각난 제 기억은 뒷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수의 공간에서 저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잘게 부서진 기억은 다시금 쪼개지고 또 쪼개져 먼지가 되어 사라졌음을 알아냈습니다. 사실 그 기억 실종 사건은 저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우 홀가분 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홀가분 해진 것도 있지만 실제 몸에 무게도 절반 이상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손에 힘이 빠져 생수병유 바닥에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좁은 골목 탓에 생수병은 바닥에 닿지도 못하고 벽과 벽 사이에 꽉 끼어 버렸습니다.

 묵을 축인 저는 알루미늄 문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문 전체에는 어마어마한 녹이 잔뜩 부푼 채 붙어 있었습니다. 녹이 파스스 부서지며 열리긴 했으나 문에 달린 작은 유리가 힘 없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변상을 할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구시렁거리며 겨우 허리를 굽혀 유리조각을 주우려는데 웬걸요, 유리가 하나도 안 깨지고 네모 모양 그대로 온전히 누워 있었습니다. 은근슬쩍 다시 틀에 끼워 넣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땅에 떨어진 유리가 안 깨지고 고대로 누워있을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바로 이끼 때문이었습니다. 골목의 바닥은 온통 이끼 투성이었습니다. 얼마나 두터운지, 푹신푹신하다 못해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발을 디딜 때마다 물이 흥건히 베어져 나왔습니다. 이끼로 뒤덮인 바닥은 골목 전체를 덮고 있었고 단숨에 벽을 타고 올라가 어느새 제 키보다 높이 스물거리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알루미늄 문도 덮어 버릴까 봐 서둘러 문을 확 제치고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습니다.

 사실 큰 기대를 하고 오지는 않았었는데 아주 작은 인기척이 느껴지길래 반가운 마음이 치솟았습니다. 그녀가 방에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알루미늄 문안으로는 주방 겸 욕실로 쓰이는 듯한 공간이 있었고 안쪽으로 작은 미닫이문이 하나 보였는데 그것이 방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없었지만 분명 그녀가 있습니다.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것이라고 충분히 알렸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방에 갇혀 있던 수증기가 폭발하듯 퍼져 나왔습니다. 제 몸 근처에 수증기는 자석에 이끌리듯 저에게 촤악 하고 달라붙어 응결되었고 전 삽시간에 폭삭 젖은 꼴이 되었습니다. 막 해수욕을 하다가 땅을 밟은 사람처럼 온몸이 물에 젖었습니다. 몸에서 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따뜻하고 촉촉하고 배가 불렀습니다. 옆구리나 허벅다리 쪽부터 잔털 같은 뿌리들이 무수히 퍼져 자라났습니다. 풍성히 자라난 뿌리 사이로 팔인지 뿌리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성성하게 생긴 팔과 손가락 사이로도 또 솜털 같은 뿌리들이 자꾸만 자라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햇살도 없는 이곳에서 그녀와 나는 마침내 만난 거죠. 오직 서로의 숨결만을 느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궁금함도, 생각해 두었던 질문들도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공간은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순수해서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안전한 순수의 공간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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