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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Jun 02. 2020

이 ‘괜찮은’ 기분은 어디서 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 La vita è bella!"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 비명을 지르면서 샤워를 한다. 갑갑한 압박 스타킹과 땀받이 하얀 티셔츠, 축축하고 냄새나는 양말을 벗어던진다. 라라 랜드 삽입곡 City of stars를 듣는다.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휘파람 소리. 웃음소리, 내 마음도 선율을 따라 가볍게 춤을 춘다.  


시간이 없다. 정말로 시간이 없다. 나는 종종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어’라고 말한다. 레스토랑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다. 아니지, 레스토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레스토랑에서 발이 부르터라 주방이며 홀을 뱅뱅 돌고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70여 일 넘게 코로나 여파로 레스토랑이 문을 닫아 기약 없이 쉬면서 나도 이 상황을 까맣게 잊었었으니까.


하루는 24시간이라고들 한다. 나는 12~14시간을 주방에서 보낸다. 10시간, 많으면 12시간이 오롯이 내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잠도 자고,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와인도 한 잔 한다. 늦은 밤 최고의 휴식은 향기 좋은 샤워젤로 음식 냄새와 땀을 기분 좋게 씻어내고,  시원한 맥주나 붉은 와인을 한 잔 하는 것이다. 

많은 요리사들은 담배를 피운다. 점심 저녁을 먹고 잠시, 그저 몇 분이다. 그날 레스토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스읍~’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후욱~’ 하고 뱉아 낸다. 그때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시간이 없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분초를 쪼갠 찰나에도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주방에 들어가 밑준비와 점심 서비스 일을 하고, 잠시 휴식하고, 다시 저녁 서비스 일을 한다. 마지막 테이블까지 모든 접시가 나가고, 주방 청소를 끝내고, 쓰레기까지 버리고 나면 12시 넘어서 마치는 건 보통이다. 이것이 주방에서 일하는 우리의 하루다. 

20대 주방 동료에게 물었다. “솔직히 우리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설명 좀 해줄래?” 운전을 하던 갓 스물을 넘긴 마우리찌오가 말했다. “우리 머리에 큰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뭐. 하하하” "넌 왜 이 일을 하니?" "나는 일하는 걸 좋아해. 여러 일을 해봤지만 그중에 이 일이 제일 재미있어." 자해 취미도 아니고 도무지 이유를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주방 노예, 시간 노예를 자처한 자들이다.     


거의 두 달 반 동안 외출도 못 하고 갇혀 지내면서 그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겨우 출근 며칠 째. 내가 하던 일이 보통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과 아주 다르다는 것, 고강도 장시간의 일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방 재투입 이틀 동안 심상치 않은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 ‘뭐야, 왜 슬픈 거지?’ 

그냥 슬펐다. 너무 슬펐다. 왜 슬픈지도 모르면서 슬펐다. 너무 힘들어서 슬펐다. 자정이 넘어 일을 끝내니 한 걸음 내딛을 힘도 없었다. 발은 온통 퉁퉁 부었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고통스러웠다. “아, 진짜, 미쳐, 발이 없는 것 같아. 발에 감각이 없는데 집에 어떻게 운전을 해서 가지?” 23살 생일을 막 지난 엘레오노라가 소리쳤다. 그러게, 하루 종일 서 있으니 체중이 온전히 실린  발가락 끝이 따끔거리던 차였다.


슬펐다. 하루 중 온전한 내 시간이 없어서 슬펐다. 타임머신을 타고 코로나 셧다운 때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키친에서 일하는 한, 주방을 떠나지 않는 한, 내 시간이 풍족하게 생길 일은 다시는 없다.

 

‘뭐야? 시간이 없어서 슬프다면, 이 일을 하는 한 나는 계속 슬퍼야 한다는 거야?’     


‘젠장, 어쩌지?’

      

음, 워워, 진정하라 제군. 방금 내가 찾은 방법이 하나 있다. 


나는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푹 빠져서 허우적댄다. 그런데 어떤 때는 우울한 덫에서 아주 쉽게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 ‘어떤 때’가 뭘까?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일에 대해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슬픔의 덫에서 쉽게 빠져나오는 아이템을 몇 개 가진 자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명확하게 스스로 알게 된다면? 내 감정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우울 지수가 극으로 달려도 나를 쓰담쓰담 토닥토닥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진한 장미향의 코달리 샤워젤로 샤워를 한다. 기분이 좋아지려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다가도 반드시 머리 끝이 쭈뼛 서도록 찬물 샤워를 해야 한다. 나도 모르게 꽥꽥거리는 비명을 지르게 되고, 몸은 놀라 열을 발산하고, 내가 내지른 소리에 미소가 절로 나게 되니까. 물기를 닦아내지 않은 피부에 아르간 오일 몇 방울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바른다.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을 듣거나,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나탈리아 긴즈부르그의 오디오 파일을 듣는다. 30분 정도 여유가 나면 108배, 명상, 샤워까지 할 수 있다.   

   

내 시간이 없어서 우울하다면, 없는 시간도 잘게 쪼개 쓰면 된다. 지금 이 순간. 샤워를 끝낸 후, 음악을 들으며 자판을 두드리는 일, '뭐야? 이렇게 쉽게? 괜찮은데?' 이렇게 쉽게 기분이 바뀌는 게 당황스럽다. 지금은 온전히 내가 살아 있는 것 같다.        

 90분의 휴식 시간. 샤워를 하고, 음악을 듣고,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꽤 기분이 괜찮다. 이 ‘괜찮은’ 기분은 어디서 왔을까?      


'Felicità, È un bicchiere di vino con un panino, la felicità ' 이태리 인들은 행복은 ‘빠니노 하나와 함께 하는 한 잔의 와인’이라고들 노래한다.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이 어쩜 그렇게 1차원적이니, 단세포니?' 하면 뭐 할 말은 없다. 뭐, 나는 그렇다고.


우울의 깊은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힘은 따지고 보면 세상 치졸하다. 아주 작은 것이 나를 슬프게도, 즐겁게도 만든다.  영화"shape of water"에서 수중 괴물을 물 밖으로 나오게 만든 것은  '삶은 계란'이었다. 거기에 음악과 포옹이 더해진다. 계란, 음악, 포옹으로 미지의 존재는 수중 괴물에서 사랑의 화신이 된다. 


'스킨십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거리 두기'가 미덕이자 의무가 된 세상이다. '코로나'라는 이름 그대로 바이러스에 왕관을 씌워 준 '거리 두는 이 세상'에서 인류 구원은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시간 시차가 있는 곳에서 내가 글을 올리지 않을 때 '글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마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꼭 안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매 순간 구원받는다.    


와인 한 잔과 빠니노 하나에도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내가 되기를.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내 행복이 좌우된다면 나의 행복은 미친년 널을 뛰게 된다는 말이다. '물질 의존적 행복' 이 조건화되면, 물질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유물론적 행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진리로 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물론적 행복의 수혜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많이 가지지 못 하면 불행한 게 당연한가? 거친 말이 나온다. 거대한 불행의 틈바구니에서 주저 앉아 울고 있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인생은 짧다. 슬퍼할 시간도 아깝다. 

Cheers! '한 잔의 와인과 빠니노!' 적은 것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자가 되기를! La vita è bella! 


시간에 쫓겨 14시간 넘는 노동의 용광로 끝에 침대에 드러 누웠다. '아, 내가 미쳐, 너무 피곤하다.' 누웠다가 마음이 불편해 다시 일어난다. '아, 젠장, 108배' 자정이 넘어 퉁퉁 부은, 되지도 않는 발로 천천히 108배를 끝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놔! 주방 노예로 살면서 꾸준히 글을 쓰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40대에 노예를 자처한 후 주방 일기로 <HEAT>를 출판, 그야말로 HIT를 친 '빌 버포드', 그는 괴물이다. 나도 빌 버포드같은 글쓰기 괴물이 되면 좋겠다. 으쌰! 힘이여, 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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