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윤 Oct 03. 2022

시장 나들이가 휴식이 되는 오늘

이탈리아 가을 시장 나들이


이탈리아 북서부의 한 작은 레스토랑에 저의 일터가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점심 서비스까지만 일하고, 월요일 오후부터 화요일 전체는 1.5일 휴무지요. 주방에서 매 순간 분초를 다투는 전쟁을 하는 제겐 아무 시간 제약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다. 휴일이 되면 가끔 친구들과 발레 다오스타 (Valle D’Aosta) 쪽으로 등산을 가기도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알람 없이 눈을 뜨고, 느긋하게 시장 나들이를 즐기는 걸 좋아합니다.


오늘은 토리노에 사는 친구 집에서 포트럭 파티가 있는 날이에요. 오랜만에 하는 토리노 나들이, 기분 좋게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깁니다. 

토리노에는 유럽에서 제일 큰 오픈 마켓, 뽀르따 빨라쪼(Porta Palazzo) 시장이 있습니다. 문(Porta)과 궁궐(Palazzo)이 더해진 이름처럼 빨라쪼 마다마(Palazzo Madama), 빨라쪼 레알레(Palazzo Reale), 빨라쪼 키아블레제(Palazzo Chiablese), 폴로 레알레(Polo Reale) 등 궁전이 밀집된 곳 바로 근처에 자리하고 있지요. 덕분에 시장 나들이를 갈 때면 하프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 음악가의 작은 콘서트를 감상하며 우아한 궁전들을 지나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성 안팎을 나누었던 거대한 붉은 장벽, 뽀르타 팔라티나(Porta Palatina)를 지나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아, 벌써 멀리서 우나에우로! 우나에우로! 쁘레고, 쁘레고!(1유로, 1유로, 어서 옵쇼! 어서!) 하는 상인들의 소리가 들려오네요. 긴 여름휴가 동안 이가 빠진 듯 군데군데 문을 닫았던 상가들도 다시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색색의 옷가지들, 어물상에서 풍기는 바다 비린내. 시장에 도착했군요. 달콤한 포도, 짭짤한 살라미, 콤콤한 치즈가 ‘어서 날 좀 사서 가시오!’ 하고 채근합니다. 뽀르따 빨라쪼가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활짝 웃는 상인들과 나누는 유쾌한 대화와 실없는 농담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갑니다. 북적북적 경쾌한 시장 분위기 덕에 어떤 날은 살 것이 없어도 시장으로 발걸음이 향하지요.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가을포도가 농부 시장 한켠에서 저를 유혹합니다.


큰 청과물 시장은 눈으로만 훑고 시계탑 너머 비교적 규모가 아담한 농부 시장으로 향합니다. 시장에 오니 가을이 다가온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햇호두, 밤, 붉은 홍시, 포르치니 버섯, 샛노란 꾀꼬리버섯, 잘 익은 포도 등이 무더운 여름 내내 수박이며 멜론, 복숭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농부 시장은 비교적 규모가 작지만 청과물이며 달걀, 치즈, 꿀, 꽃까지 판매자가 직접 키우고 가공한 상품들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농부 시장에 갔을 때 시칠리아 품종의 동그랗고 커다란 연보랏빛의 가지를 보고 "이거 시칠리아 산이죠?" 하고 물었다가 "어허, 이거 내 밭에서 내가 키운 거예요. 100% 피에몬테 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쿠! 제가 둥그런 가지 모양만 보고 실수를 했네요. 고향이 시칠리아라도 피에몬테에서 나고 자랐으니 피에몬테  100% 맞네요!"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저기 단골집 가브리엘레 매대가 보이는 군요. "가브리, 이번에도 여름휴가는 못 간 거야?" "수박이며 복숭아는 여름휴가를 모르고 쑥쑥 자라나니 어쩌겠어? 하하하." 농사짓는 아버지를 도와 새벽부터 나와 장사를 하는 건실한 청년입니다. 가브리엘레 농원에서 한여름 휴가도 모르고 쑥쑥 자랐을 홍옥을 하나 얻어 슥슥 닦아 맛을 봅니다. "그래, 오늘은 뭘 만들 거야?" " "바투타 디 파소나를 할까 해." 피에몬테 품종의 하얀 암소 ‘파소나’, 바투타는 ‘때리다, 내려치다’라는 뜻입니다. 질 좋고 부드러운 암소 고기를 날이 선 칼로 잘게 잘라 소금, 헤이즐넛 오일, 서양 겨자를 아주 살짝 넣고 간을 할 생각입니다. "가브리, 육회 위에 올리게 피노키오, 어린 당근, 비트 좀 주겠어?"


참, 포트럭 파티라고 꽃이 빠지면 섭섭하지요. 얼른 근처 마리엘라 할머니 꽃 매대로 갑니다. 제 앞에는 배가 나온 백발의 할아버지가 여자 친구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고르고 있습니다. 첫 데이트를 준비하는 소년처럼 할아버지 볼도 발그스름 한 달리아 색이네요. 활짝 웃는 얼굴로 꽃다발을 품에 안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할아버지 모습에 제 입가에도 미소가 절로 번집니다. 저 역시 친구에게 선물할 달리아를 한 아름 골라 들었습니다.


마리엘라 할머니의 정원에서 자란 꽃들은 소박하지만 강인합니다. 


채소랑 꽃은 샀고,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는 루치아나 아줌마 달걀 매대로 가 볼까요?


루치아나 아줌마 매대는 참 재미있습니다. 작은 바구니마다 아주머니가 매긴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 지지요.


루치아나 아줌마는 달걀이 들어간 레시피를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걸 낙으로 삼으세요. 비뚤비뚤 종이 위에 손글씨로 쓴 레시피가 투박하지만 정겹습니다. 오늘은 '또르따 카발라'외에도 피에몬테식 초콜릿 푸딩 ‘부네트’와 뜨거운 계란 크림 ‘쟈바이오네’ 레시피도 눈에 띄네요. 오늘은 루치아나 아줌마의 조언대로 날도 쌀쌀해지고 했으니 유기농 계란과 모스카토 다스티, 설탕이 들어간 따뜻한 크림 쟈바이오네를 만들어볼까요? 친구가 만들어 올 피칸 파이에 함께 곁들여 내면 좋겠습니다.



무게가 나가는 와인은 마지막에 사야겠어요. 육회용 소고기를 사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이, 그래 오늘은  만들건가?" 마리노 아저씨 정육점이에요. 신선한 피에몬테  고기를 믿고   있는 곳이지요. 오늘은 어떤 고기가 신선한 ,  고기 부위로   있는 요리는  뭐가 있을지 조언을 구합니다. 14 때부터 정육점에서 일을 하셨다니 전문가 중의 전문가지요. 시장에는 믿고 조언을 구할  있는  분야의 숨은 베테랑이 많습니다. 작은 식재료 하나를  때도 질문이 많으니 마트와는 달리 시장 나들이는 언제나 생각보다  길어지곤 해요.


피에몬테 산 고기들을 믿고 살 수 있는 정육점


'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어느새 친구 사라와 다 마르코(Da Marco) 앞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입니다. 다 마르코는 뽀르따 빨라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와인 상점입니다. 니노 아저씨와 마릴레나 아줌마 부부가 130년 전통의 가게를 잘 이어가고 있지요. 니노 아저씨 가게에서 와인이나 리큐어를 사면 틀림이 없습니다. 가격대, 목적, 취향을 이야기하면 그에 꼭 맞는 질 좋은 와인을 추천해 주시거든요. 친구끼리 포트럭 파티에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화이트 와인으로 아르네이스 한 병과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어울릴 바르바레스코 한 병을 추천받아 샀습니다.


어머나, 육회에 넣을 소금을 깜빡할 뻔했습니다. 바로 근처 향신료와 곡물로 유명한 디타체니에서 살레 말돈을 조금 삽니다. 그럼 이제 다 샀나 싶을 때 시칠리아 산 오레가노 꽃가지가 손을 흔들며 저를 유혹하는 군요. 자연 건조한 꽃이라 초록빛이 살아 있습니다. 카프레제나 브루스케타에 뿌리면 제 값을 하겠어요.


제게는 시장 나들이가 휴식입니다. 온갖 식재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뿜어 내는 색과 향의 콘서트, 유쾌하게 일하는 상인들, 경쾌한 사람들의 발걸음.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장시간 서서 일하는 덕에 피곤한 다리도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은 착각일까요?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려 걷다가도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친구와 노천 카페테리아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으면 그만입니다. "짠! 친친! Cin Cin!" 햇살 아래 빛나는 와인 한 잔이면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선물로 바뀌지요. 소소한 휴일의 시장 산책이지만 햇살 아래에서 친구와 한 잔 할 수 있는 이 여유가 감사합니다.



시장이 주는 위로로 나는 또 한 끼의 만찬을 준비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님아, 제발 그 옷을 벗지 마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