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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Oct 24. 2022

초코 우유 때문에

일요일 아침 다섯 시, 할머니랑 목욕 가기

"지윤아, 지윤아."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단잠에  저를 흔들어 깨웁니다. "?" 잠결에 대답을 합니다. " 할매랑 목욕탕 갈래?" "할머니, 저는  갈래요. 나중에 엄마랑 갈게요." 이번에는 옆에 누운 동생 지엽이를 흔들어 깨웁니다. "지엽아, 지엽아." "왜요?" " 내캉 목욕탕 가자." "이렇게 일찍  갈래요. 나중에 갈게요." "에이, 못된 가시나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서 안심하고 잠이 청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이번엔 엄맙니다. "지윤아, 지윤아." ".... 왜요?" "엄마가 부르는데 왜요가 뭐고! 할머니랑 목욕탕 가라!" "아니 지금이  신데 목욕탕을 가요?" 거의 울먹이며 대꾸를 합니다. "할머니가 첫새벽에 목욕탕 가야 물이 깨끗하다  하시나. 니가  가면 할머니 등은 누가 밀어 주노? 때밀이 아줌마도 이렇게 일찍은  나온다." 할머니한테는 싫다고 해도, 엄마 말씀에는 어쩔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챙겨 입습니다.


캄캄한 새벽 5시. 집을 나서면 아무리 꽁꽁 싸매도 쩡 하고 머리가 얼얼해질 만큼 추운 겨울입니다. 목도리, 벙어리장갑, 털모자, 털신까지 신어도 추운 바람은 빈 틈을 잽싸게 파고듭니다. 최대한 틈을 내 주지 않으려고 목을 쏙 집어넣은 거북이 꼭을 해서 종종걸음을 걷습니다.


"다 왔다! 퍼뜩 온나!" '목욕' 간판에 환하게 들어온 불이 할머니와 나를 반깁니다. "경로 하나에 아 하나요" 할머니는 할인된 두 사람 몫의 목욕비를 내고 목욕탕 탈의실로 들어섭니다. 내키지 않지만 추위 때문에 신발을 챙겨 들고 얼른 들어섭니다. 이른 아침이라 평소 같으면 뜨끈할 장판도 미지근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꽁꽁 얼어붙는 밖에 비하면 꽤 더운지라 두껍게 껴입은 옷에 온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나도 모르게 옷을 재빨리 벗어재낍니다.


"봐라, 할매 따라오길 잘했제? 을마나 좋노? 아무도 읍꼬 한산하니." '좋기는 뭐가 좋아요, 잠만 오는 구만......'아직 졸음이 주렁주렁 달린 무거운 눈을 슥슥 비빌뿐입니다.  그렇다고 미적거릴 수가 있나요? 할머니가 잡아 끄는 손에 이끌려 샷시 미닫이 문을 열고 탕 안으로 들어섭니다. "할머니, 추워요." "춥기는 뭐가 춥노? 쪼매만 있어 봐라." 그야말로 첫 손님이라 탕 안은 물이 바짝 말라 있고 서늘한 기운마저 감돕니다. 할머니는 얼른 열탕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확 틉니다. "할머니, 너무 뜨거워요!" "뜨겁긴 뭐가 뜨겁노? 아까는 춥다드만!" 뜨거운 물에 살이 벌게질 지경이라 할머니 몰래 찬물을 졸졸 틉니다.


조금 있으니  안에  하고 열기가 가득 찹니다. 작은 열탕 안의 뜨거운 물이 발목까지, 배꼽까지, 가슴까지 금방  오릅니다.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니 숨이 가빠집니다. 열탕 안의 작은  위에 올라앉아 가슴께를 위로 올립니다. 조금 낫습니다.

"어허~ 시원~하다." 할머니는  이상합니다. 물이 이렇게 뜨거워서 살이 벌게지는데 시원하다니요. "할머니, 이렇게 뜨거운데  시원하다고 해요?" "모르는 소리 하노, 이기 시원한 기지."

잔소리 말고 때나  불리라며 답답해서  밖으로 나서려는 저를 만류하십니다. "때를  불리야 나중에     아프다이. 단디 불리라." 작은 찬물 바가지를 뜨거운 물에 동동 띄워놓고 빨개진 얼굴에 조금씩 끼얹으면서 겨우 버텨 봅니다.


"됐다! 나가자!" 다행입니다. 할머니가 오케이 사인을 주십니다. 아, 그런데 다행도 잠시, 할머니가 때수건을 들이대십니다. "가마이 있으라이!" 할머니는 엄마 손과 달리 손이 맵습니다. 작은 부위도 후벼 파듯이 꼼꼼하게 때를 미시니 가만히 앉아있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몸이 비비 틀립니다. "야가 와 이래 배배 꼬아쌌노? 정신 사납다!" '찰싹'하고 등짝을 한 대 맞습니다. "할머니, 살살이요, 살살" 등이 따가워서 계속 꽈배기처럼 몸을 꼬던 때, 불현듯 들리는 소리.


"아이고, 이게 누고, 지유이 할매 아이가? 일찍도 왔네." "일요일이라 목욕 왔나? 여는 내 손주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지유이가? 많이 컸데이."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하는 인사는 언제 주고받아도 어색합니다. "근데, 혼자 왔나?" "하모~ 우리 손주들은 멀리 산다 아이가. 그라고 이렇게 첫새벽에 누가 목욕 올라 카나?" 갑자기 손녀 손을 잡고 목욕 온 우리 할머니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우리 지유이가 손이 야무지대이! 할매 등 좀 밀어봐라!" 때수건에 비누를 조금 묻히고 할머니 등을 밀기 시작합니다. 때밀이 아주머니가 하시던 대로 손바닥 전체에 힘을 주고 우리 할머니처럼 후벼 파듯이가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때를 밉니다. "아이고, 시원하다." 할머니도 오랜만에 기분이 좋습니다. "할머니, 이제 됐지요?" "그래, 참말로 시원하네. 근데, 잠깐만 있어 바라. 할매 친구 등도 밀어야제."

"예? 예......" 졸지에 우리 할머니 등 넓이 세 배는 되는 할머니 친구 등도 밀어 드립니다.


찬물에서 장난을 잠깐 치려는 찰나, 할머니 친구분들 두 분 더 들이닥치십니다. "지윤아, 이 할매 등도 좀 퍼뜩 밀어 드려라!" 오늘 아침은 제 이름이 아주 인깁니다. 그날 첫새벽부터 할머니는 물론 할머니 친구 세 분의 등을 다 밀고 나니 일요일 아침부터 노곤노곤 힘이 쪽 빠집니다.

"뭐 하노? 퍼뜩 씻고 가자!" 할머니 친구분 등까지 민다고 기진맥진인데 할머니는 제 속도 모르고 또 재촉이십니다.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세숫대야에 머리카락을 다 담그고 얼른 머리를 감은 후 욕탕을 나섭니다.


"뭐 마실 끼고?" 제일 기다렸던 시간입니다. 박카스, 요쿠르트, 흰 우유, 딸기 우유, 초코 우유, 바나나 우유가 탈의실 냉장고 안에서 일렬로 선 채 저를 기다립니다. "초코 우유요."

"아줌마요, 초코 우유 하나 주소. 나는 야쿠르트."

속옷만 겨우 챙겨 입고 목욕탕 탈의실 평상에 나란히 앉아 초코 우유와 야쿠르트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먹습니다. 

"빨리 머리 말리고 가자. 머리   말리면 감기 든다이!" 할머니의 연이은 재촉에 먹다  우유는 옆에 잠시 두고, 열심히 머리를 드라이기에 말립니다. 100원을 넣으면 3 30초만 뜨거운 바람이 나오니 재빨리 머리카락을 털어 가며 말려야 합니다.


엄마가 챙겨주신  팬티에  내복을 안에 챙겨 입고, 주섬주섬 겉옷도 다시 챙겨 입습니다. 신발을 신고 목욕탕을 나서 찬바람이 얼마간은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문디 같은 할매들이 우째 알고 다 우리탕으로 와가지고, 등 민다고 고생했제? 다음에는 대연탕 가자!"

 '다음에는 저 말고 지엽이랑 오세요.' 하려다 콕하고 쥐어 박힐까 봐 속으로만 말대꾸를 합니다.


때를 민 덕분인지 몸이 새털처럼 가볍기만 합니다. 초코 우유를 빨대로 쪽 한 모금 빨고 싱긋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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