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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Oct 26. 2022

내 어린 날의 부엌

혜영이 언니의 연탄불 후라이팬 고구마 구이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가 하나 있다. 신랑까지 네 식구 식사를 매일 매끼 아주 정성껏 그것도 예쁘게 차려낸다. 담아내는 그릇도 담음새도 정갈하다. 요리 전문가들에게 열심히 수업을 듣고, 그릇도 도자기 하는 선생님에게 주문하고. 식구들을 위한 매끼 식사는 예쁘게 사진으로 찍어 매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그런데 한 날은 그 친구의 한 친구가 그랬단다. "너 때문에 인스타그램 들어가기가 싫어. 너한테는 새로운 것 같지? 내가 볼 땐 그 나물에 다 그 밥이야. 그만 좀 올려, 지겨우니까!"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순간 나도 귀가 의심되었다. 친구가 친구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혹시 친구의 탈을 쓴 남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 사이에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친구의 친구는 그렇게 매끼 좋은 식재료로 식구들 식사를 챙길 물질적, 시간적, 정신적 에너지가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아주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보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가시 돋친 이야기를 했을까? 아마도 네 친구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너무 깊이 생각하진 마. 매일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집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이겨낼 힘이 생기겠다."


나는 어릴 때 밥을 어떻게 먹었더라?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 동생 둘에 나까지. 총 일곱 식구가 복작복작 한 집에 살았으니 밥 한 번 차려 다 같이 먹는 것도 큰 일이었다. 다들 바쁜데 친구처럼 그렇게 예쁜 그릇에 우아하게 차려 먹을 수는 없었다. 상차림은 참으로 투박하지만 식사 후 한 번도 아쉽거나 배가 고팠던 적은 없다.


간식도 아쉽지 않게 무엇이 되었든 언제나 넉넉하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게 통 큰 할머니가 한겨울에 너무 많이 만들어 봄까지 남은 물엿이 짓이겨진 강정이 되었든, 갓 쪄낸 옥수수가 되었든, 시원한 수박화채가 되었든, 고소하게 볶아낸 미숫가루가 되었든, 한 상자씩 사서 꼭 바닥에 몇 개씩은 파랗게 곰팡이가 슬어 아깝게 버려야 했던 노란 귤이 되었든 말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대식구가 한 집에 같이 살다 보니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혼자 무엇을 먹는 일도 드물었다. 부모님이 일을 한다고 하루 종일 집 밖에 계시는 친구들은 끼니든 간식이든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부모님이 맞벌이하시는 친구 집에 가보고 알았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 가스 불을 켜고 무언가를 굽고 지지고 하는 일은 초등학교에 고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다. 동네 친구나 언니들이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 배고픔을 가리는 법을 보고 나서부터.


처음으로 친구가 혼자 밥을 챙겨 먹는 걸 본 건 동네 친구의 현빈이 집에서였다. 같이 놀다가 배가 고프니 밥을 먹겠단다. 난 배가 안 고프니 신경 쓰지 말고 너 챙겨 먹어 그랬다.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옥색 주걱으로 전기밥솥에서 밥을 가득 퍼서 밥그릇에 담았다. 그리고는 날계란 하나를 톡 깨어 밥 위에 올렸다. 거기에 간장과 버터까지 넣고 슥슥 비벼 먹기 시작했다. 친구는 맛있다며 내게도 권했지만, 나는 그렇게 먹는 친구를 쳐다보기도 쉽지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먹는다고?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날계란을 하나 톡 깨어 드시는 걸 본 적은 있지만, 그 당시까지 날계란을 먹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곧 현빈이 동생이 들이닥치더니 자기 입맛에 맞는 다른 메뉴를 준비했다. 뜨거운 밥에 커다란 숟가락으로 설탕을 고봉으로 몇 번이나 넣고 우유를 붓더니 설탕 우유 밥을 만들어 폭폭 퍼 먹었다. 친구네 두 자매는 맛있게 잘도 먹는데 나는 도무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반면, 우리 뒷집에 월세를 들어 살던 시골에서 이사  혜영이 언니는 내게 간식의 신세계를  보여 주었다. 언니 집에 숙제를 한다는 핑계로 놀러 갔을 때다. 밥때는 멀었고, 허기는 지고. 혜영이 언니는 맛있는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맛있는 ? 우와~ 언니 간식도 만들  알아?”잔뜩 기대가 되었다.


언니는 부엌으로 가더니 빨간 고구마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칼로 고구마를 손가락 굵기로 둥성둥성 잘랐다. 탁탁 도마 위에 소리를 내며 고구마를 자르는 언니가 그렇게 어른처럼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연탄 불 위에 후라이팬을 올렸다. 연탄구멍이 빨갛게 타오르고 연탄가스 냄새가 순간 확 올랐지만 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언니는 능숙하게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휘리릭 둘렀다. 그리고는 동그란 단면의 고구마를 하나하나 모두 후라이팬에 올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해. 뒤집었을 때 색깔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기름이 튈까 봐 무서웠지만, 도무지 눈을 후라이팬에서 뗄 수가 없었다. 언니 말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슬슬 구수한 좋은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앞뒤로 노랗게 잘 익은 고구마를 언니는 신문지 위에 올려 기름을 뺐다. 나도 모르게 손이 고구마 구이로 갔다. "잠깐! 아직 아니야!" 언니는 하얀 설탕을 고구마 위에 솔솔 뿌렸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노랗게 기름에서 잘 익은 고구마가 설탕을 만나 바작바작하니 달콤했다. 고구마는 삶아서 우유랑 먹거나, 엄마가 명절에 튀김옷을 입혀서 튀긴 것만 먹어봤었는데, 기름을 붓고 노릇하게 구워내다니......  


고구마 구이를 다 먹고, 손가락에 묻은 설탕까지 쪽쪽 다 빨아먹고는 아주 존경하는 얼굴로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다음엔 더 근사한 간식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우와! 이것보다 더 근사한 간식을 만들 줄 안다고?" 그렇다, 언니는 당시 내게는 허락되지 않던 칼, 불, 기름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다음에 언니가 만들어 준 더 근사한 간식은 정말로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언니가 그 특별한 간식을 만들어 준 건, 아빠가 술 한 잔 하고 기분 좋아 사 오신 닭튀김 몇 조각을 몰래 숨겨 두었다가 언니에게 가지고 간 며칠 후였다.  


언니는 엄숙한 얼굴로 연탄 불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후라이팬을 올렸다. 이번엔 식용유를 그냥 휘리릭 두르는 게 아니었다. 후라이팬에 반은 차오르게 꿀렁꿀렁 기름을 계속 부어 넣었다. "언니, 뭐 하는 거야?" 나는 명절만 되면 튀김을 할 때 엄마가 멀리 떨어지라고 몇 번이고 주의를 주셨기 때문에,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기름을 붓는 언니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기름을 부었지? 아직 아무것도 넣으면 안 돼. 기다려야 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언니는 손바닥을 기름 위에 공중부양하듯 띄워서 손바닥으로 기름의 열기를 가늠하는 듯했다.

언니는 도대체 뭘 만들려는 걸까? 언니는 곁에 있던 주황색의 삼양 라면 봉지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라면? 라면은 끓여야지!" 언니는 잠자코 있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는 아무 고민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바싹 마른 네모난 라면을 기름 속에 퐁당 집어넣었다. 기름에 잠긴 라면은 곧 황금빛 색으로 바뀌었다. "조심해!" 언니는 완전히 기름에 잠기지 않았던 라면을 뒤집었다. 언니가 마치 무슨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곧 꼬불꼬불 엉킨 네모난 라면은 그 모양 그대로 황금빛이 도는 갈색이 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언니는 튀긴 라면을 깨끗한 신문지 방석 위에 올렸다. 기름이 빠진 라면을 이번엔 언니가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면 봉투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새하얀 설탕 몇 숟가락과 함께. "잘 봐!" 언니는 라면 봉투 끝을 잘 동여매고 신나게 라면 봉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신문지 위에 확 쏟아냈다. 아! 그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맛이라니....... 왜 언니는 두 봉지를 튀기지 않았을까?


그 후로도 언니는 국수를 삶아서 찬물에 잘 헹군 뒤, 간장,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버무려 먹는 법, 김치를 숭숭 썰어 밥과 볶아 먹는 법, 감자와 계란을 삶아 노른자를 포크로 으깬 후 설탕과 마요네즈를 조금 넣고 먹는 법을 알려 주었다. "감자가 설익으면 그것만큼 맛이 없는 게 없어. 감자나 고구마는 젓가락으로 찔러서 끝까지 폭 들어가야 다 익은 거다?"


언니가 모델이 되었던 게다. 그 후, 나는 엄마가 다 만들어두신 걸 그냥 담아서 홀랑 먹는 단계에서 벗어났다. 물론 1번 실험은 고구마 후라이팬 구이였다. 나중에는 계란 후라이는 물론,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 노랗고 하얀 계란 지단 지단 부치기, 포슬포슬 분 내게 감자를 삶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지금쯤 혜영이 언니는 어디서 누구에게 뭘 만들어주고 있을까? 내 친구의 친구에게는 아마도 혜영이 언니 같은 언니가 살면서 곁에 없었나보다.


겉은 살짝 바삭하니 쫀득하고 속은 포슬하니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짝지근하던 혜영이 언니의 고구마 후라이팬 구이가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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