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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Oct 30. 2022

이탈리아 사람들이 국화꽃을 사는 날

11월 1일이 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가족 묘지를 찾습니다.

한국인은 못 해도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는 꼭 가족묘를 찾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무리 못 해도 일 년에 한 번, 11월 1일이 되면 납골당을 찾지요.


'11월 1일? 어? 할로윈 다음날 아니에요?' 맞습니다. 11월 1일은 이탈리아에서는 'Il giorno di tutti Santi'라고 불리지요. 한국말로는 '모든 성인들의 날'이 됩니다. 저야 이탈리아에서만 제성절을 지내보았지만,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천주교를 믿는 국가들이라면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라고 해요.

 

여러분은 할로윈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10월의 마지막 날인 할로윈 하면 유령 얼굴 모양으로 눈코입을 파내고 안에 초를 넣은 누런 호박등이 먼저 떠올라요. 호박 라비올리, 호박 리조또, 호박 파이 등 여러 가지 호박 요리 레시피두요.


아침 식사를 하러 동네 카페테리아에 들렀더니 귀여운 쿠키들이 할로윈 시즌이라고 먼저 알립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할로윈의 기원이 모든 성자의 날(All Hallow Day) 전야제, 즉, 'Hollow's Eve'에서 왔다고 해요. 모든 성인들의 날 하루 전날인 할로윈은 아직 천국에 가지 못 한 령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었다고 하네요.

젊은이들이 귀신 분장 하고 신나게 밤이 늦도록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뜻이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의외였어요. '천국에 가지   령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한다......'  따뜻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군요.


이탈리아에서 정작 훈훈한 날은 할로윈 다음 날이지요. 바로 11월 1일입니다. 원래는 11월 1일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을 위한 날, 그다음 날인 11월 2일이 일반 신도들을 위한 날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누구인들 자신의 가족이 천국에 갔다고 믿고 싶지 않겠어요? 굳이 성인으로 추대되지 않아도, 11월 1일이 되면 이탈리아 인들은 천국으로 갔을 먼저 떠난 가족들을 위해 납골당을 찾습니다.


11월 중순만 되어도 이탈리아 꽃집이나 화원은 하얗고, 노랗고, 붉은빛, 황금빛의 화려한 혹은 자잘한 꽃송이를 뽐내는 국화들이 물결을 이룹니다. 1년 중 꽃집이 가장 바빠지는 시즌이지요.

모든 성인의 날이 다가오면 화원 전체가 국화꽃으로 뒤덮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꽃집에서 당일 가서 고르기도 하지만, 먼저 간 가족을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몇 달 전에 벌써 화원에 커다란 대형 국화꽃 화분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분마다 주문한 사람의 이름표가 붙어 있지요.

색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는 이탈리아 인들. 묘소에 놓는 국화꽃도 잔잔한 핑크부터 강렬한 빨간색까지 다양합니다.


'에이, 뭐 1년에 한 번인데 뭐 그렇게 이야기할 거리가 있나요? 한국 사람은 기본이 일 년에 두 번 아닌가요?' 하신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탈리아에 와서 느낀 특이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납골당이 사람들이 사는 곳과 아주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앞 집에 사는 복숭아 농사짓는 베뻬 할아버지도 몇 년 전 먼저 가신 부인 주세피나에게 인사를 하러 매일 아침저녁으로 납골당을 찾지요. 바로 집에서 걸어서 10분, 차로는 2~3분 거리에 납골당이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일 겝니다. 시골로 갈수록 납골당 규모는 작지만, 그 위치는 거주 지역과 가까워지지요.


대도시로 갈수록 공동묘지는 규모가 커지고 도시 외곽에 위치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도시의 공동묘지는 베니스 국립 공동묘지였어요. 수많은 작은 섬들이 다리로 이어진 물의 도시답게 공동묘지를 가는 길도 배를 타야만 했었죠. 수상 버스를 타고 베니스 국립 공동묘지로 가는 물길 위에 망자를 태우고 가는 배의 조각상이 기억이 납니다. 참 슬프고도 아름다웠거든요. 한겨울에도 녹음이 가득한 베니스 국립 공동묘지는 또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답던지요......


베니스 성 미켈레 공동묘지 앞  'La Chiatta di Dante(단테의 방주)' 조각상. 손으로 공동묘지를 가리키며 얼굴을 갸웃하고 바라보는 모습이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이상하지요? 이탈리아 공동묘지에 가면 참 마음이 편해집니다. 보통 묘비마다 고인의 생전 가장 밝은 미소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그럴까요? 아니면 햇살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조각상과 향기로운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곳이라서 그럴까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면 아마도 집 다음이 납골당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도 해코지를 하지 않는 곳 말이죠. 저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나 봐요. 한 번은 캠핑카 한 대가 동네 납골당 주차장 앞에서 주차하고 밤을 보내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공동묘지 앞에서의 하룻밤이라...... 왠지 으스스할 법 하지요? 하지만 조용하고, 물이 나오고, 화장실이 있고, 주차장이 넓고, 무엇보다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공동묘지가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이탈리아 사람들은 못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일요일에는 가족묘를 찾는 것 같아요. 제가 시골에 살아서 더 자주 목격하는 셈일 수도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납골당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은퇴하고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나, 특히 배우자를 먼저 보내신 분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자주 찾으신답니다. 묘비 앞의 사진을 윤이 나게 닦고, 꽃화분에 물을 주고, 묘비 앞을 쓸고 닦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시지요.


한국에서는 외조부님 산소를 한 번 가려면 너무 멀리 있어 한 번 찾아뵈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한 편이라 명절마다 성묘를 갈 때면 미리 걱정이 되곤 했어요. 영락공원에 도착하면 이미 속은 메슥메슥 힘들고 머리는 어지럽고..... 왜 또 그렇게 설날엔 한복이 춥고 추석엔 한복이 더웠을까요? 설날엔 한복 치마와 저고리 속에 두꺼운 내복을 껴입고 겉엔 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춥고, 추석엔 아무리 얇은 한복도 땀에 젖었습니다. 하지만 다섯이나 되는 이모들과 사촌 언니, 오빠, 동생들과 함께하는 성묘 나들이는 참 즐겁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친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산 범어사 절에 모셨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역시 집에서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한 번 나들이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어머니도 허리와 무릎이 안 좋아지셔서 특별한 날만 찾게 되신다고 하셨어요.


한국에도 공원묘지가 사람들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아름답게 조성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 12월 초 모친을 잃은 이탈리아 친구 하나는 일요일마다 잊지 않고 동네 어귀의 가족묘에 나란히 잠들어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갑니다. 내일인 일요일은 더 바쁠 거라고 하네요. 11월 1일에 제일 가까운 일요일이라 부모님 말고도 친할머니 할아버지 묘소와 외조부님 묘소를 다 찾아뵐 거래요. 국화꽃을 한 아름 안은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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