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24분. 비행기가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타기를 극도로 싫어하던 친구는 큰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하루 만에 여행을 결정하면서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 추운 겨울,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따뜻한 곳으로의 여행은 어려웠다.
여행의 조건은 단 하나. “비행기만 안 타면 돼.” ‘남들 다 타고 다니는 비행긴데…….’ 왜 저렇게 유난일까 싶었다.
쿵! 양옆으로 흔들리던 비행기가 훅 하고 얼마간 아래로 갑자기 고도가 떨어졌다. 내 심장도 갑자기 훅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쉽게 잦아들지 않는 심한 비행기의 흔들림에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순간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항공 승무원을 하거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일은 매번 이런 위험에 아주 잦게 노출되는 일이겠구나. 어떻게 이렇게 생명을 위협받는 일을 계속 할 수 있지?’ 머릿속의 다른 생각이 또 꼬리를 문다. ‘생명을 위협받는 일? 요리사 또한 명이 짧기로 유명한 직업이 아닌가?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명을 단축한다면 내가 하는 일이 더욱 높은 위험군의 일이다.’
순간 비행기가 또다시 이리저리 양옆으로 마구 흔들린다. 금발 곱슬머리의 작은 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가던 한 남성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테네리페에서 따스한 겨울 휴가를 보내고 다시 추운 나라로 돌아가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꿈같은 휴가의 대가를 불안으로 되갚고 있는 듯했다.
비행기가 제시간에 브룩셀에 도착해 밀라노행 다음 비행기를 무사하게 타면 좋겠다는 조바심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 얼굴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꽉 감고 제발 무사히 비행기가 어디든 안전하게 착륙하기를 바랐다. 친구 역시 눈을 감고 나즈막히 들릴 듯 말 듯 카톨릭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처절한 사랑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손을 꼭 붙잡았다.
사르데냐에서 토리노로 돌아갈 때,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인천으로 갈 때 두어 번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다. ‘세 번째구나. 이렇게 비행기 안에서 불안했던 게. 이번에도 별일 없을 거야…….’ 불안감에 심장이 터질 듯했지만 애써 다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딩동’ 알림음이 울리고 안전벨트 권고 알림등이 꺼졌다. 몇 십 분 만에야 승무원들이 다시 비행기 안 복도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갑자기 잠깐 멈췄던 영화가 다시 재생된 듯했다. 오후 6시 47분, 그야말로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비행기가 다시 안정권에 접어든 것이다.
‘아! 살았다!’ 안도의 깊은숨을 쉬었다.
오후 7시 12분. 드디어 지상의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창문 아래로 보이는 브룩셀 불빛은 마치 황금 거미줄 같다.
비행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작은 쿵 하는 충격도 없이 너무나 매끄럽게 활주로에 착지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다 함께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비행기는 정확히 1시간 연착이다. 누구 하나 불만을 터트리는 이는 없었다.
“밀라노 리나떼 행 비행기는 A72번 게이트입니다.” 승무원이 다가와 환승 게이트를 알려줬다. “얼마나 시간이 있죠?” “여유 시간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쩜 저런 이야기를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하는 걸까? A60번 게이트에서 A72번 게이트까지는 보통 5분 정도 거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이 보통 상황이 아니다. 테네리페 테이데 봉 근처 등산 중 미끄러져 친구 무릎에 문제가 생겼다. 무언가를 잡고서야 천천히 한 발짝씩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23A, 23B. 너무 뒷좌석이다. 추가로 돈을 내고 앞쪽 좌석을 선점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문득 10년 전 프랑스 파리 드 골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쳐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과연 밀라노행 비행기를 무사히 탈 수 있을까?
여행이란 게 원래 이렇게 불안을 껴안는 일이었던가?
무사히 어디로든 도착만 하게 해 달라고 했건만. 안전한 비행기 착지 후의 안도와 감사도 잠시, 자잘한 불안과 작은 숙제들이 다시 시간을 달린다. 발걸음이 바쁘다.
2025년 1월 10일 금요일. 테네리페에서 브룩셀로 향하던 브룩셀 항공 비행기 안에서 기록한 메모를 더듬어 글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