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왜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 “어쩌다. 실수지 뭐.”
하루 꼬박 열 서 너 시간.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네 시까지, 그리고 오후 다섯 시 반부터 자정 무렵까지. 점심 서비스만 해도 남들이 하루 종일 꼬박 채워 일하는 8시간 근무. 점심 서비스가 끝나면 이미 기진맥진입니다.
두 시간 남짓을 쉬고 난 후, 무거운 다리를 끌고 다시 고성으로 가는 오르막을 오를 때. 주방의 열기 때문에 추위도 잊었다가, 청소를 마치고 고성을 나서면 강하게 불어오는 칼바람에 흠칫 놀랄 때. “지금 몇 시지? 자정이 넘었네. 휴~ 수고했다. 내일, 아니, 몇 시간 후에 보자.” 한 손으로는 쓰레기 박스를 애인인 양 꼭 붙들어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동료가 주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며 검은 하늘을 볼 때. 엄지손톱만 한 작은 라비올리를 양손 검지를 이용해 꼬집꼬집하며 반나절에 10키로를 만들어 낼 때. 여러 생각이 스칩니다.
‘아...... 내가 무슨 영화를 바라고 낮밤도 모르고, 계절도 잊고 이 두껍고 어두운 고성 벽 안에서 일을 하는 걸까? 인생은 짧고 소중한 데. 내 삶의 뭉텅이를 이렇게 툭 떼어 다른 사람의 이름과 부를 위해서 내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게 맞는 걸까? 이게 정말 나를 위한 삶의 방식일까?’ ‘그렇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이탈리아 어 수준을 끌어올리고,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 했던 소믈리에 코스를 마친다면? 이탈리아 피에몬테 전문 미식&와인 가이드, 통번역은?
한 소녀가 계란 바구니를 안고 갑니다. 소녀는 계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고, 그 닭이 다시 알을 낳고, 알이 다시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고...... 어머나! 어쩌다 그 소녀는 덜컥,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는 바구니 안의 계란을 모두 깨 버렸네요.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지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주방에서 쏟았을까요? 40대 초반의 나이로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드센 이탈리아 남자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이며 불 앞에 하루하루 서왔습니다. 믿는 구석이라고는 실력밖에 없었습니다. 되지 않는 것이 있을 땐 밤을 새워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무거운 조리도구들이 많은 주방은 남자들의 성역이지요. 무시당하지 않고 자리 매김을 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루하루 감사했습니다. 20대 초반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는 체력과,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팔다리가 감사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정말 건강뿐이구나’ 생각할 무렵입니다. 100명 점심, 140명 저녁 단체 손님을 치고 나자, 2018년 상했던 오른쪽 손목이 순식간에 다시 빨간 신호등을 켰습니다. 그렇다고 쉴 수가 있나요? 오른손을 쓰지 못 하니 왼손을 자주 쓰게 되었어요. 그러니 왼쪽 손목도 무리가 오더군요. 급기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찾아오던 손가락 류마티즘 증상까지...... “난 오십에 류마티즘이 왔다만 너는 겨우 마흔에 류마티즘이 오다니......” 멀리 있는 엄마께 괜히 걱정까지 끼쳐 드렸습니다.
2019년 가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습니다. 결국 그 덕분에 왼쪽 손등엔 큰 흉이 남았습니다. 손등에 남은 흉터를 보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쉬었어야 하는데. 왜 몸을 돌보지 않았을까?’생각했습니다. ‘다음엔 멍청하게 부지런하지 말자. 내 몸은 하나니까.’스스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손목에 탈이 나 버렸습니다. ‘그래, 이번은 아니지.’ 계속 무리하면 수술을 해야 할 지도 모르던 상황, 쉬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온 생을 불태우던, 울고 웃던 주방을 그렇게 떠났습니다.
참...... 쉬웠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렇게 바보처럼 울고불고 했을까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나요? 손목 수술 대신 한 시간 떨어진 아스티에서 냉동 치료를 일주일에 두 번 받습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는 연필을 잡습니다. 레시피를 정리하고, 편지를 쓰고, 이탈리아 어 공부를 합니다. 하루 10만 보, 좁은 주방 안에서만 종종걸음으로 뛰고 걷던 다리로는 가고 싶었던 와이너리 방문도 하고 친구도 만납니다. 그리고, 수 년 동안 잃어버렸던 일요일을 되찾았습니다. 바다도 보러 가고, 검은 호수를 찾아 산에도 올라 야생 블루베리도 실컷 맛봤습니다. 내일은 토리노 만드리아 공원에 말을 타러 갑니다. 다음주 목요일 저녁엔 제빵 관련 책을 낸 Fulvio Marino 의 책 소개 행사에 갑니다. 포카챠 가게에서 빵과 포카챠를 소개하는 책 행사를 한다니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쉬어도 되는 걸까요? 조금 겁이 납니다. 하지만, 조바심 내고, 안달 낸다고 세상이 내 속도에 맞춰 달려주지 않는다는 걸 이탈리아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잠깐, 쉬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