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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03. 2022

이탈리아에서는 천사도 사람 봐 가며 나타난다.

나폴리 역의 검은 천사들


세상에는 천사가 참 많다. 이상하다. 교황이 있는 바티칸의 나라 이탈리아여서 그런 걸까? 나는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이탈리아에 오고 나서 참 많은 천사들을 많이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이탈리아 어 까막눈에 귀머거리, 벙어리인 기간 동안 약자의 입장,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한, 그 나라 말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초반에는 유창하게 하던 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이탈리아 말을 못 합니다."의 세 마디였으니,  오랜 삽질의 세월이 상상이 되리라.


그런 상황이니 토리노 외곽 산 마우로 토리네제에 살 때, 휴대폰을 잊고 외출하거나 휴대폰 배터리라도 꺼지는 날이면 영락없이 곤란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자주 오지도 않는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언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려야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구글맵이 안 되니 이미 눈에 익은 길이 아니면 길 잃은 고아 신세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한 번은 산마우로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꺼졌다. 겨울이라 해는 일찍 지고, 밖은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되고, 도무지 어느 정류장에 내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갑에서 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 바로 앞에 앉은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께 영어로 물었다. "실례합니다, 이 주소로 가야 하는데요,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 해요?" 아저씨는 세 코스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섰다. "세 코스라니요, 두 코스만 가면 되는데! 날도 어두운데 길 잃으면 어쩌라고!" 정류장은 다가오고, 대체 두 정류장 중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하지만 세 코스 뒤든 두 코스 뒤든 그중 하나에만 내리면 된다! 50프로 게임이니 당황할 건 없다. 그 정류장이 아니라도 한 코스 차인데 까짓 거 좀 걷지 뭐. 나 대신 열을 옥신각신 하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뒤로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후다닥 내렸다.

그 저녁, 내가 두 코스 후 내렸는지, 세 코스 후 내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음날, 날이 밝고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은 그 두 버스 정류장 사이에 있었다는 걸. 어디에서 내려도 되는 일이었지만 옥신각신 천사들 덕분에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고 미소가 지어졌던 저녁으로 기억된다.


몇 년 후, 세월이 흘러, 이탈리아 말도 제법 하고 요리사로도 자리를 잡아 북서부 피에몬테에서 남부 아말피 해안으로 직장을 옮겨 갈 때였다. 장거리 이사지만 짐은 백팩 하나, 캐리어 세 개로 줄였다. 백팩은 등에 매면 그만이지만, 옮길 캐리어는 세 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손은 두 개뿐이었다. 그러니 방법은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먼저 밀어놓고, 그 캐리어를 따라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가는 식이었다. 어찌어찌 친절한 사람들이 캐리어를 기차에 올려 주고 내려주고, 무사히 야간열차 여성 전용 침대칸에 몸을 싣고 나폴리 역에 도착했다.


문제는 나폴리 역에서 살레르노 역으로 기차를 갈아탈 때였다. 기차 출발 시간이 다가오는데, 갑자기 플랫폼이 바뀐 것이다. 바뀐 플랫폼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급할 때는 일이 더 꼬이기 마련이다. 그렇다, 엘리베이터는 고장이었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기차 시간은 빠듯하고..... 아! 저 높은 계단을 캐리어 세 개를 끌고 어떻게 올라가지?’ 우선 큰 짐 하나를 양손으로 끌어안듯이 번쩍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발 밑의 계단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무거운 캐리어를 안고 뒤로 넘어질 판국이었다. ‘아..... 내 작은 캐리어 두 개는 어쩐다?’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나폴리, 그것도 기차역에서 내 짐이 방치되다니, 최악이다.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계단 아래에선 내 빨갛고 검은 내 작은 캐리어 두 개가 나를 우두커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릴 두고 가는 거니?

자꾸만 뒤를 보며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을 찰나, 훅! 하고 강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 "우리가 도와줄게!" 누구냐? 너희는? 꼬불꼬불 긴 머리 가발과 긴 생머리 흑채 가발을 쓴 건장한 흑인 여자 두 명이었다. "아니, 아니야, 안 도와줘도 돼......"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빨간 손톱의 딱 붙는 미니 스커트 아가씨들은 이미 내 캐리어를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재빠르기도 해라, 그 높은 하이힐을 신고 어떻게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디야? 어느 기차야?" 저들이 내 짐을 들고 도망가는 건 아닌가 싶은 두려움도 잠시, 기차 출발 시간이 코 앞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플랫폼 번호를 확인했다. "저기!" "어? 저기 차장이 기차에 막 올라타려는 중이었다." "Capo treno(차장)이 올라타면 끝이라구! 뛰어!" 건장한 검은 말 같은 아가씨들이 하이힐에 기다란 가발을 휘날리며 뛰기 시작했다. 나도 낑낑대며 커다란 캐리어를 들들들 끌고 뒤를 따라 뛰었다. 어떻게 제시간에 맞춰 기차에 올라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작은 내 두 개의 캐리어는 얌전하게  기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오라고 손짓하던 두 아가씨들이, 알고 보니 기차가 출발하지 못하게 한 발을 기차에 올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장은 발을 내리라고 호루라기를 연신 삑삑 불어대고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땀으로 샤워를 한 내가 올라타자마자, 아가씨들은 재빨리 힘을 합쳐 내 큰 캐리어도 함께 올려 주었다. "고마워!" 짧은 감사의 인사를 외치듯이 던지고 나자, 기차는 바로 문이 닫혔다. 출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아가씨들은 울지 말고 잘 살아보라고 하늘에서 보내준 검은 천사 같다. 검고 매끈한 피부에 기다란 가발 머리칼, 그들의 강한 향수처럼 살레르노로 내려가는 여행 내내 여운이 남았다.

'고마워, 검은 천사들! 잠깐 너희를 의심했어. 미안. 세상에는 생각보다 천사들이 많구나.’


"이탈리아 와서 참 천사들을 많이 만났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어디서든 누군가가 나타나 도와주더라구요."라고 말했더니, "천사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나는 30년 가까이 이탈리아 살았지만 전혀 못 만났어요. 어디 나도 좀 도와 달라고 해봐요." 조언을 구하러 만났더니, 지금 나랑 경쟁하자는 거냐며 경계를 하던 한 한국인 여성의 말이었다. '아...... 저런 성격이면 천사가 가까이 왔다가도 머리채 잡힐 까봐 도망가겠다.'싶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낯 모른 사람의 도움도 참 많이 받았다. 내가 청하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모습을 보고 말없이 도와주는 천사들의 도움이었다.

나폴리에서 빨간 잇몸과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땀범벅의 검은 천사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도우리라 마음먹었었나 보다.


모 도시 한인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갓 이탈리아에 도착한 사람에게 집 구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단다. 초반엔 그저 친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이탈리아 공인 중개사보다 많은 돈을 요구하더라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집 구하는 데 도움을 부탁한 적이 있다. 나도 돈도 없는 학생 신분이었으면서, 그 멀리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버스로 동행해 아는 친구 집을 소개해 주고, 밥까지 내가 샀다. 그래도 기분만 좋았다. 그동안 받은 도움의 씨앗을 세상에 다시 뿌리는 기분이었달까?


어느 겨울 저녁, 토리노에서 날이 어두워질 무렵 비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중년의 한국 아저씨들이 출장을 왔는지, 멋지게 차려입은 양복이 무색하게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세요? 뭐 도와 드릴까요?"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한밤중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어머, 한국인이세요?" 경계의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순간, 하지 않았어도 될 아는 체를 했구나 싶었다. '아, 내가 오지랖이 넓었나? 친절을 베풀고 싶었던 내 마음이 저 사람들 눈에는 사기꾼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아니요, 됐어요. 괜찮습니다." 추위보다 더한 아린 마음이 들었다.


천사를 많이 만나 보셨나요? 계산 없는 호의를 받아보셨나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당신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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