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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02. 2022

반했냐? 이탈리아 꼬마 스토커가 김에 반해버렸다!

아! 소중한 내 김! 다 먹진 말라, 이 꼬마 녀석아!

한 꼬맹이를 알게 되었다. 나이는 12살이라는데 15살처럼 보이는. 한국 나이로는 14살이니 아주 꼬맹이도 아니다. 올해 초 월경을 시작하고, 월경 후 가슴 폭풍 성장, 내 빈약한 가슴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 꼬맹이.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무슨 옛날 영화 대사 같다.


나는 몇 년 동안 바롤로와 가까운 그린자네 카불 고성 바로 근처에서 살다가 작년 여름쯤 바르바레스코 근처로 이사를 왔다. 이사 후 알게 된 이웃은 아침마다 꽃에 물을 주며 잠옷 바람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백발의 카를라 할머니, 흠 있는 복숭아를 아낌없이 가져다 주시는 복숭아 농사 짓는 앞집 베뻬 할아버지, 그리고  500미터 너머에 사는 이 꼬맹이다.


이 꼬마, 처음엔 낯을 많이 가리더니. 나중에 내 번호를 따고 나서는 아주 찰거머리가 됐다.


‘띠링!’ 와츠앱 알람 소리. 뭐지? 열댓 개의 메시지 알람이 한꺼번에 울린다. 어떻게 이렇게 빠른 시간에 문자 폭탄 대량 생산이 가능한지 그 놀라운 능력에 감탄할 정도다. 내가 옆에 있어도 내게 스티커 문자를 보내는 꼬맹이. 넌 내가 옆에 있어도 내가 궁금하니? 면대면보다 메시지로 주고받는 의사소통에 도 편안함을 느끼나 보다. 너 사춘기냐?


이곳은 시골이라 차가 없으면 발이 묶인다. 몸도 마음도 변화무쌍한 시기. 레스토랑을 하는 부모님을 따라 레스토랑 안에 갇혀 있느니, 집에 혼자 있는 걸 택할 때가 많은 꼬맹이다. 그런데 혼자 노는 것도 한두 시간이다. 이 꼬맹이도 늦잠 늘어지게 자고, 혼자 파스타 한 그릇 뚝딱 해 먹고, 틱톡 뒤져 가며 하하 웃다가도 한참 혼자 집에 있다 보면 심심할 게다. 또래가 없는 시골, 방학이면 또래를 만날 일이 없다. 그때가 문자 폭탄이 오는 때다. 우리집은 혼자 걸어서도 올 수 있으니까.


지윤 지윤 지윤 지윤 지윤 뭐해?


아! 걸렸구나! ㅜㅡㅜ


한 번은 바쁜 척도 해 봤다. 그런데 너무 근처에 살다 보니 그 척이 안 통한다.


너, 집에서 풀 뽑고 있던데, 오늘 바빠?

니 차 있던데 집에 있지? 놀러 가도 돼?

또 스시 먹으러 갈까?

미뇽 2 개봉하던데, 영화 보러 갈래?

시내에 산책하러 가자!


아, 이 꼬맹이. 내가 애를 일찍 낳았으면 너 만 한 애가 있을 나인데, 넌 내가 친구로 보이는 게냐?


이 꼬맹이는 내가 끄적끄적 슥슥 색연필로 대충 자기 얼굴을 그려주는 걸 보더니, 다음에 놀러 왔을 땐 150색 디자인 전문가용 색 사인펜을 가지고 나타났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색 채우기 책을 샀다나?

내가 공부를 좀 해야 한다고 했더니, 자기도 숙제를 가지고 오겠단다.

나 진짜 공부한다 했더니, 자기도 진짜 영어 숙제해야 하니 도와 달란다.

아, 어찌 이 끈질긴 꼬맹이에게 등을 돌리리오?


하지만 공부도 잠시, 요즘 관심이 가는 빨간 꼬불머리에 하얀 얼굴, 온통 주근깨로 얼굴이 덮인 ‘빨강 머리 앤’이 떠오르는 학교 동급생 파올로(Paolo) 이야기뿐이다.


“내가 사귀자고 했거든. 그땐 바로 그러자고 하더니, 조금 후엔 생각해 봤는데 사귀지 말쟤. 얜 뭐야? 파올로 엄마가 우리 학교 수학 선생님이거든. 친구들이 파올로 엄마한테 가서 내가 파올로랑 사귀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겠대.”


, 이런. 아서라!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지도 모르는 남자애 뭐하려고? 남자는 확신을 주면 우쭐해진다고. 네가 사냥하려고 하면  너보다 발이 빨라서 도망 가요! 정말  애랑  되고 싶으면, 사냥 본능이 생기게 그냥 신경 끄고  생활  하고 지내라. 이미 니가 친절하게 먼저 고백해 버려서  녀석은 혼자 우쭐하다가, 니가 관심이 없는  같으면  니가 궁금해  거야.


“그래? 정말 그래? 알았어.” 하고는 인스타에 파올로가 좋아요를 눌렀다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꼬맹이.


이 꼬맹이가 좋아하는 게 파올로 말고 하나 더 있다. 바로 김이다. 한국 김.


폴란드에서 온 성웅이 오빠 가족이 이탈리아 놀러 올 때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여기 한국 가게도 많아.” 폴란드에 한국 기업 엘지가 들어가 있어서 한국 가게가 많다는 설명이었다. “정말? 음...... 아니야, 괜찮아.” 오빠는 오빠가 도착하기 전 생각해서 필요한 걸 꼭 알려 달라고 했다. “아! 오빠! 생각났어. 나 김이 먹고 싶어. 한국 조미김.”


그렇게 성웅이 오빠 네 가족의 캐리어 안에 실려 귀하게 비행기 타고 온 조미김. 네 개 세트가 총 세 봉지였다. “이렇게 많이? 고마워!”


꼬맹이가 집에 오면 이 김을 들킬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김초밥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가자고 조르는 녀석인데, 파삭한 조미김 맛을 한 번 보면 돌이킬 수 없겠지.

어릴 때 나 몰래 사탕을 숨기던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달달하니 하나 먹고 나면 또 손이 가던 스카치 버터 캔디. 자꾸 입이 말라 먹는건데 탐내지 말라고 하셨지. 난 '무슨 할아버지가 손주 사랑이 이래?' 싶었다. 그런데, 이 무서운 꼬맹이를 만나고 김을 숨기는 나를 보면서 할아버지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 김은 소중하다구!


“나 배 고파.”

“어, 그래.”


집에 있을 땐 무조건 1일 1식! 하루에 음식 준비를 두 번 하는 건 질색이다.


게으른 나는 점심에 많이 해서 조금 남아 있던 내 소중한 미역밥과(미역은 좋아하는데, 국이나 볶음으로 따로 만들면 설거지가 귀찮아서 미역 볶다가 불린 쌀 넣고 콩나물밥 식으로 대충 내가 만든 레시피다.) 적당하게 익은 아보카도, 그리고 그 귀하신 조미김님을 꺼냈다. “너! 이거 귀한 거니까 딱 세 장만 줄 거야.” 세 장이 어딘가? 한 번 밥에 싸서 먹도록 자르면 밥 18 숟가락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어? 뭐야?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꼬맹이 몇 초만에 내가 잘라준 김을 게눈 감추듯 다 먹었다. 그리고는 하하하 웃으면서 김을 들고 온 집안을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게 섯거라! 안 뺏어먹을 테니까, 제발 한 자리에서 먹어! 그렇게 와구와구 입으로 뜯어먹으면서 김가루 방방곡곡 흘리지 말고.”


잠시 얌전해지는가 싶더니, 폴란드에서 물 건너 온 이 한국산 김에 흥분제라도 들어 있는 건지 새로운 맛에 흥분한 꼬맹이를 잠재우긴 역부족이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접어 먹고, 뜯어 먹고, 와구 쌈 싸듯이 구겨 먹고. 뭐지? 이 꼬마, 전생에 한국인?


결국 내 소중한 김 한 봉지는 꼬맹이에게 다 털렸다. 내 김~!!! 이 김 중독자 같으니라고! 얼마나 소중한 김인데!!!


"또 있지?"

"아니!"

"또 있는 거 다 아는데?"

"읍어!"


나머지 김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캐리어 속에 숨겨두길 잘했다.


실컷 하하하 웃으며 김을 다 먹고는 소파에 드러누워 천정을 보고 꼬맹이가 입을 열었다.


“난 어떨 땐 완전히 혼자 같아. 영혼이 갈 곳이 없어. 뇨코가 있어서 다행이야.(뇨코는 두 살박이 노란 비만 수컷 고양이다.) 어제는 뇨코를 꼭 끌어안고 울었어. 엄마가 날 낳은 걸 후회한댔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꼬마의 엄마에게도 사춘기가 잠시 왔던 걸까?  나는 그 꼬마에게 뭐라고 말해줬어야 했을까?


이 꼬맹이, 조미김 한 봉 혼자 다 털어 먹고 나서는 무슨 일인지 며칠째 조용하다. 잘 지내고 있을까? 아깝지만 꼬맹이가 돌아오면 김 한 봉지만 더 꺼내야겠다. 딱 한 봉지만.


꼬맹아 꼬맹아 꼬맹아 꼬맹아 꼬맹아,  김 먹으러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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