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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12. 2022

오늘은 비지니스맨처럼! 이탈리아 비지니스 석 기차 여행

이런 호강이 있나!

이른 아침 토리노 뽀르따 수자 역.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이탈리아 저가 기차와는 다르게 가격이 비싼 '프레차 로싸'는 연착도 없이 이름 그대로 빨간 화살처럼 제시간에 드어옵니다. 뽀르따 수자 역은 기차가 들어오기 2-3분 전에 '까로짜(기차 칸)' 번호가 플랫폼 전광판에 표시됩니다. 1분 1초가 돈인 비지니스맨들은 이탈리아 사람 답지 않게 기차가 들어온다는 전광판이 뜨자마자 신속하게 자기 번호 앞으로 움직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2번 까로짜 앞에 있어야 할 제가 11번 까로짜 앞에 있습니다. 이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캐리어를 끄는 오른쪽 어깨가 뻐근합니다.


일을 하지 않던 학생 신분, 바쁠 것도 없지요. 기차를 탈 일이 있을 땐 오전 9시 전에 출발하는 표를 예매하는 일은 거의 없었죠. 그러니 뽀르따 수자 역은 뽀르따 누오바 역과는 달리 언제나 한산한 줄로만 알고 있었지요. '뽀르따 수자 역은 뽀르따 누오바 역처럼 붐비지 않고 한산해서 좋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웬걸, 뽀르따 수자 역이 이렇게 붐비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플래폼이 넘칠 듯 가득 찬 사람들 때문에 걸음이 더뎌집니다. 기차의 2번 기차 칸 앞에서 11번까지 가야 하는데, 종종걸음으로 겨우 5번 앞. 차장인 까뽀 디 트레노가 호루라기를 연신 불며 재촉하니 냅다 뛸 수밖에요.


왜 좀처럼 미련한 욕심이 줄지 않을까요? 길어야 일주일 남짓 여행인데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기차로 오르는 겨우 세 칸 되는 작은 계단을 오르기도 벅찹니다.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올려봅니다. 역시 이곳은 신사도가 살아 있는 이탈리아였던가요? 앞의 남자가 성큼 다가와 짐을 들어줍니다.


이탈리아로 여행을 와서 무거운 짐을 옮길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구요? 당신이 남자이거나, 밀라노에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저도 자리를 찾아봅니다. 17D, 17D, 17D...... 이런, 고심해 고른 17번 라인 전체가 역방향입니다. 17번 라인에 의자는 셋 뿐인데 내 번호는 17D..... 더구나 17번 라인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 빈자리가 없습니다. 다시 살펴보니 역방향이라 오른쪽 두 자리에 A, B 좌석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그럼 거긴 아니고, 왼쪽 한 자리가 C 아니면 D여야 하는데...... 이미 왼쪽 자리 하나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 홀로 앉아있는 양복 신사에게 자리 번호를 물어보려는 찰나, 그 양복 신사 아저씨가 먼저 입을 엽니다. "Questo qua?(여기에요?)" "Penso di sì(그런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더니, 씩 웃으며 다른 칸으로 가 버립니다. 이탈리아에도 싼 좌석을 끊어서 비지니스 석에 앉아 가려는 사람이 있군요. 셈에 빠른 약은 사람, '푸르보(furbo)'였군요.  


드디어 자리에 앉아봅니다. 지난번 밀라노에 갈 때는 마주 보고 앉은 롱다리 신사 때문에 다리를 못 펴서 꽤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혼자 뚝 떨어져 앉은자리를 선택했지요. 아, 그런데 제 다리는 왜 이렇게 짧을까요? 다리가 겨우 마닥에 닿을 듯 말 듯해서 편하지가 않습니다. 딸깍. 옆 라인의 시뇨라가 발판을 내립니다. 아하! 이런 방법이. 저도 따라 발판을 내리고 다리를 척하고 올렸더니 한결 편합니다.


부온 조르노, 부온 조르노! 내가 탄 것이 기차가 아니었던가? 비행기가 아닐진데? 높다란 높은 손수레에 갖가지 신문을 담은 승무원이 다가와 신문을 권합니다. 스탐파를 골랐습니다. 좀 있으니 비행기 기내 서비스처럼 커피, 주스, 물, 와인, 스낵, 파운드 케이크를 싣고 카트가 지나갑니다. 아침이니 커피와 물, 파운드케이크를 골랐습니다.


발판에 발도 올려 편하고, 향기로운 커피에 파운드케이크도 먹고. 기분이 좋아져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저 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요? 그러고 보니 일반석의 네 좌석이 들어갈 자리에 푹신한 가죽 암체어 세 개만 들어서 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비지니스 석을 끊었을 뿐이데, 이런 강이 있나요? 보통 남부에  때는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어서 밤기차 침대칸을 이용하곤 했습니다.   시쯤 토리노에서 출발하는 밤기차 인떼르 시티 노떼는 아침 10시가  넘으면 살레르노에 도착합니다. 아무리 침대칸이라고는 해도 12시간이 넘게 덜컹거리는 기차에 누워 있자면 허리가 아파오기 마련이지요. 어릴  티비에 소개되었던 러시아 횡단 열차를 보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런 기차를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12시간 종단 열차를  , 일주일 넘게 달린다는 러시아 횡단 열차의 꿈은 살포시 내려놓았지요.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프레차로싸가 달려갑니다. 푹신한 암체어에 앉아 배달되는 신문에 조식을 즐기며 6시간만 가면 된다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런 호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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