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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Sep 13. 2022

기차 시간 급한데 표도 못 샀던 날

이탈리아에서 기차 시간 급한데 표도 못 샀을 때는?

데드 라인


날짜와 시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꼭 하고 싶었던 일도 흐지부지 되거나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꼭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하고, 지켜야 한다.


비행기 타기도 그렇다. 여행 짐 싸기도 그렇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


이탈리아에서 기차는 거의 언제나 늦게 도착하니까. 하지만 내가 늦을 때는 기차는 언제나 정시에 정확히 도착해서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 왜 하루 전에 짐을 미리 싸놓지 않는 걸까 나는. 오! 이런! 뒤늦게 생각해낸 종이테이프. 결국 찾지는 못하고 찾느라 시간만 보냈다. 마음이 급하다. 이놈의 싸구려 아파트엔 엘리베이터도 없다. 아니,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싸겠지. 평소엔 사뿐하게 랄랄라 다니다가도 무거운 여행 캐리어를 들고 오르내릴 때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름이 로자였던가... <자기 앞의 생>에서 모하메드를 돌보는 늙은 창녀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피트 꼭대기 층에 사는 자기 신세를 얼마나 한탄했던가. 우리 집은 3층이니 그나마 감사할 일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텅텅 소리를 내며 끌어 내린다고 1층 개가 또 짖어댄다. 한국 엄마 곁에 두고 온 내 개 복순이가 보고 싶다.


운이 좋게 버스가 바로 와서 잡아 타고 도착하니 기차 출발 5분 전. 이런! 티켓 판매소는 너무 멀고 무인 티켓 발매기는 카드만 된다. 현금이 들어가는 발매기 앞엔 꾸물대는 아저씨 하나. “이 기계 현금되는 거 맞죠?” “”그럼요.” 아! 그럼 뭐 하나. 꾸물대는 그대가 내 장애물이다.


토리노에서 알바로 가는 기차는 한 시간에 한 대. 알바에서 그린쟈네 카불로 들어가는 버스도 한 시간에 한 대다. 셰프 란테리는  3시까지 오라고 했지만 주방 동료 안드레아와 가브리는 2시까지 가자고 합의. 그렇다면 당연히 나도 2시까지다. 스테이져 주제에 손이 제일 빨라야 하는 아뮤즈 부쉬와 안티파스토를 떠맡은 데다 숙소에서 레스토랑으로 갈 땐 안드레아 차를 얻어 타는 신세니.


기차 출발 시간 4분 전, 마음은 급한데 이 기차역 엘리베이터는 왜 또 이렇게 먼가. 달랑 들고뛰어지지가 않으니 다시 텅텅 소리를 내며 계단으로 캐리어를 끌어내린다.


출발 시간 3분 전 도착 성공. 예스! 그러나 기쁜 마음도 잠시. 연착 방송도 없이 기차는 5분이 늦다. 허무하다! 표 사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렇다고 지금 다시 올라가 표를 사기는 부족한 시간이다.


시간이 없어 기차표를 미리 사지 못 했을 때는 기차 위에서 카포 트레노(capo treno)에게 표를 산다. 하지만 기차 출발 전 미리 말하는 게 낫다. 떡 하니 앉아 있다 표 검사 왔을 때 말하면 무임승차로 오해받아 벌금을 물 수도 있으니.


카포 레노를 찾는 법. 기차 맨 앞칸이나 맨 뒤칸에 서 기차 출발 전 승객이 다 왔는지 확인을 하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오! 저기!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자.


“미 스쿠지!(Mi scusi. 영어로는 excuse me. 실례합니다. 이 상황에선 '저기요! 저기요!')” 한참을 목 터져라 불러도 한쪽만 본다. 이 사람아, 승객의 안전을 확인하려면 앞뒤를 다 보고 출발을 결정해야지. 참.... 그대.... 일 하는 방식이 이태리스럽다. 대충대충 설렁설렁 말이지.


내 캐리어 진짜 무겁다고. 젠장, 결국 캐리어를 끌고 차장을 만나러 힘겹게 앞칸으로 간다. “Lei è capotreno? 레이 에 카포 트레노?”(capo는 '장', treno는 '기차'다. 역장은 들어봤지만 기차장? 어감이 이상하다. 한국 말로는 기차에 올라 운행을 책임지는 자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  돌아보는 빨간 곱슬머리에 날카로운 작은 눈의 거구의 여자. 일도 대충 하더니 친절하지도 않다. “ 알바(Alba)까지 가는 표를 사고 싶은데요.” 짜증이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Sì, ma deve pagare 5 euro in più! ,  데베 빠가레 친꿰 에우로  . (하지만 5유로  내야 해요.)


보통 이런 경우, 안 됐다는 표정을 짓거나, 'purtroppo 뿌르뜨로뽀'(애석하게도)라는 말을 덧붙이거나, 친절한 역장의 경우엔 다음부터는 미리 발권하라고 하고 추가 요금을 받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이 카포 트레노는 단단하기가 그 거대한 몸을 둘러싼 견고한 살 장벽 같다.


5유로. 어제저녁 Da Marca에서 5유로 보태서 더 좋은 와인을 사거나, 처음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한 디제스티보로 먹는 리큐르에 담긴 각설탕병을 샀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소리를 친다. “Questo treno va Alba???(이 기차 알바 가요?)”  “맞아요.” “Non ci posso credere! Non ce la faccio! O che caldo! O mio O mio! Grazie mille. (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못 할 짓이야. 이렇게 더울 수가!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보다 더 급하게 시간에 쫓기며 기차를 탔나 보다. 그 바쁜 와중에 바르르 떨리는 손엔 기차표도 들렸다. 자리에 앉아서도 끓임 없이 중얼거리며 뭔가를 해댄다. “아, 정말 땀에 다 젖었어요.” 정말 덥기도 덥겠다. 안엔 그렇게 두꺼운 호피 목티를 입고 뛰었다니...... 모자를 벗더니 가방에서 빗을 꺼내 땀에 젖은 머리를 빗는다. 서양인들은 몸에 비해 머리가 작으니 얼굴만 봐선 몸집을 가늠하기 어렵다. 젖은 짧은 머리칼 아래엔 흐물흐물한 작은 산 같은 몸이 의자 위에 얹혔다.


오늘의 교훈.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이 있다면, 역시 미리 서두르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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