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모는 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하우스 키핑, 야채 가게, 공장 등에서 고된 노동을 하다가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자식들을 명문 대학교에 진학시킨, 아주 전형적인 아메리칸드림을 이뤄낸 한인 이민 1세대이다.
1981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새댁이었지만 신랑을 따라 새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큰 이모가 미국으로 떠난 후 당시 두부 장사를 하시던 외할머니는 장사를 준비하시며 그렇게 우셨다고 했다.
대개의 한인 교포들이 그렇듯 우리 큰 이모 역시 미국에서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닌다. 이모가 한 번씩 전화로 교회 얘기를 꺼낼 때면 우리 엄마는 아무리 언니여도, 아무리 먼 곳에서 온 전화여도 “언니야, 그런 얘기할 거면 전화 하지마래이~” 하며 이모의 전도를 철벽같이 방어했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전도를 듣고 있으면 어떻게 저렇게 신념이 강할 수 있는지 마냥 신기하고 궁금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이모가 미국으로 떠난 그때쯤의 이모 나이가 되어 타국에 살면서 그토록 궁금하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에게는 육 남매가 있었는데, 그중 세 딸들에게 일 시키는 것도 아깝다며 손수 하실 정도로 딸들을 아끼셨다. 특히 공부를 잘했던 큰 이모는 항상 방에서 공부를 하고, 둘째 딸인 엄마는 그래도 부엌에서 할머니를 도왔고, 천방지축 막내딸인 작은 이모는 할아버지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논에서 뛰어놀았다고 한다. 그 시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똑똑했던 딸들이 그랬듯 이모 역시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일을 시작했다. 이모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 입고 학교 대신 회사로 출근하며 경리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6살의 아름다운 꽃, 미화 씨는 결혼을 하고 이듬해 신랑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형제들이 먼저 미국에 살던 이모부와 달리 이모는 친정 식구도, 친구도, 정말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에서 입던 말끔한 정장들은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어졌다.
처음 시작한 하우스 키핑 일은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27세의 미화 씨는 평소 버스를 타고 다니던 그 거리를, 가득 쌓인 눈 때문에 발이 젖는 것도 잊은 채 힘들고 외로워서 펑펑 울며 걸어왔다.
그 후 새로 구한 야채 가게에서는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해야 했던 터라 일이 끝난 후에는 아파트 2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갈 힘이 없어서 계단 앞에 주저앉곤 했다.
남편과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에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갈 데도 없던 미화 씨는 75번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며 이대로 계속 달리다 보면 죽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뽀얀 피부와 조용한 성격을 지닌 미화 씨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은 채로 생전 해본 적 없는 육체노동과 살림, 거기에 육아까지 해야 했다.
먹고사는 것, 생존 전쟁 때문에 남편은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했고, 미화 씨 역시 갓난쟁이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공장으로 나서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새벽에 어린아이들을 보모에게 맡긴 뒤 공장으로 향했고, 일이 끝난 후에는 바로 아이들을 피아노, 댄스, 수영 등 학원으로 데리고 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아이들의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늦은 식사가 끝난 뒤, 다음 날의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를 하고 나서야 긴 하루가 마침내 끝이 났다.
아이들이 학원 수업을 듣는 동안 잠깐 조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 시스템에 그것도 영어로 소통해야 했기에 간단한 학부모 면담조차 미화 씨는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싶은 마음에 자식들 교육을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왔다.
그렇게 그녀는 1년 365일, 24시간을 언제나 팽팽한 긴장 상태로 달렸다.
엄마가 되는 것도 처음인 데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했던 미화 씨는 훨씬 더 외롭고 지난한 시간들을 견뎌야 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한국인인 부부와 달리 미국 사회에서 미국의 교육을 받고, 미국식 사고로 자라는 아이들과의 세대적,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미화 씨의 삶의 무게는 한국에서 똑같이 맞벌이 학부모였던 우리 엄마의 그것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한국에 계시던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즉 이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이모는 그날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터로 향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 미화 씨의 30여 년이 흘렀다.
외할머니, 엄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이모는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30여 년 전의 얘기를 그때 자신의 나이가 된 조카 앞에서 우연히, 아주 덤덤히 회상했다.
한국어를 완벽하게 알아듣고 그 너머에 깃든 한국 정서를 이해하는 사람, 타국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삶도 이해하는 사람, 이모의 친정 식구인 사람, 이전에 이모에게 없었던 온전히 이모의 편인 나에게.
그런 이모가 지난 30여 년의 모진 세월 동안 사무치게 그리웠던 한국을 찾을 수 있던 곳, 유일하게 한국어를 사용하며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리고 고단한 이모의 삶을 어루만져 준 존재는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이모에게 교회란 단순히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라 그리운 한국의 모든 것이자 간절하고 유일했던 희망의 끈이었던 것이다.
장성한 자식들이 떠난 이모의 집에는 자식들의 어린 시절이 담긴 사진들과 그간 그들이 써준 카드들, 종교 서적과 성경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린 시절 쓰던 방에는 이모의 작은 기도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책장엔 각종 신앙 도서들이 꽂혀있고 깊은 마음을 담은 성경 필사와 이제는 조금 어색해진 한글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쓴 기도문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빼곡히 적힌 이모의 기도에는 어김없이 아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모든 행동의 속도가 느려진 이모지만 기도를 하실 때만큼은 다부진 기운이 얼굴에 퍼진다.
그녀의 기도는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그리고 지금의 평안에 대한 감사를.
머리가 하얗게 센 이모는 여전히 일주일에 다섯 번, 차로 30분 거리의 한인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신다.
오늘도 이모는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며 동트기 전의 고요한 어둠을 길벗 삼아 교회로 향하신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이모의 뒤를 따라 지난 시절을 견뎌온 숭고한 인내와 강인함이 그녀를 감싸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