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연애가 끝이 났을 때, 슬퍼하는 주변인들에 비해 나는 오히려 덤덤했다. 가끔씩 이젠 안녕이라는 말이 떠오를 때마다 무거운 한숨이 어색한 미소와 씁쓸하게 나왔다. 눈물이 나오기보단 텅 빈 공기만이 고요한 내 마음에 맴돌았다. 슬프다는 감정보다 쓰린 감정이 더 진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가 참 지독했고 동시에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둘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쉽사리 누구 하나 꺼내지 못하던 사실, 예전의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말로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에 대한 원망도 나 자신에 대한 후회도 우리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우리 그저 거기까지였구나 했다.
이른 아침 White Point에는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일정하게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와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만이 그 곳을 감싸고 있었다. 내 숨소리가 그 곳의 정적을 깨는 것 같이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나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내가 지난 시간동안 셀 수 없이 불렀던, 마치 나만의 소중한 무엇인듯한 그의 이름.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채 깨닫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 번 쏟아진 눈물은 한참을 파도에 밀려 내려갔다.
한참 전에 끝이 난 그 관계를 모질게 자르지 못했던 나는 그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려 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서서히 자연스럽게 잊혀지길 바라면서. 아주 좋은 변명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여행을 떠나겠다는 건 이미 식어버린 마음과 그럼에도 끊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을테니깐. 그리고 나 역시 반복되던 그 굴레에서 벗어나오고 싶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내가 막상 그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쳤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는 것이라 믿었던 우리 사이가 이제는 정말 끝이 났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별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마음이란 참 바보같다. 좋은 사람이라고, 나에게 잘 맞는 사람이라고 머리가 정확하게 계산한 것을 마음은 그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하나둘 회상하며 나는 바람 결에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의 20대는 덕분에 참 반짝거렸고, 행복했다고. 내가 누렸던 행복만큼 꼭 누군가로부터 다시 사랑 받기를 바란다고. 이제 우리 정말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