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유니폼이 바뀐다는 소문이 있어서 결혼한 오빠를 제외하고 부모님과 함께 그전에 가족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사진을 찍어본 지가 20여 년도 더 넘어서 과연 부모님이 괜찮다 하실까 싶었는데 흔쾌히 동의하셨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사진을 찍는 김에 영정사진도 같이 추가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나랑 엄마는 이게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지니 아빠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거 없다며 말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기도 하고,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이른 느낌이라 굳이 찍어야 되나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옛날처럼 자식들이 많아서 일을 분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 둘이서 얼마나 정신없겠냐며 영정사진이라도 찍어두면 편하다며 단호하게 말을 했다.
솔직히 나는 영정 사진을 미리 찍는다는 것에 별 거리낌도 없고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아직 70도 되지 않았고 심신이 멀쩡한데 벌써 싶었을 뿐이었다. 엄마 역시 떨떠름해하며 벌써 찍어야 되나 반기를 들었지만 아빠는 완강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나는 스튜디오를 예약하면서 가족사진과 함께 부모님의 영정 사진을 추가했다.
사진 촬영 당일, 아침부터 엄마와 아빠는 옷장 전체를 헤집고 나서야 단정하고 말끔하면서 잘 어울리는 옷으로 차려입었다. 은퇴 후의 단순하고 조용한 삶 속의 오랜만의 외출이자 특별한 이벤트라서 두 사람은 퍽 들뜬 모습이었다. 포근한 볕에도 아직은 찬 공기가 감도는 늦겨울,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어색하고 쑥스러운 노년의 부모님께 사진관에서 찍는 이런 정식 사진은 더욱 긴장되고 어려웠다. 특히나 20여 년 전 어두컴컴한 배경에 아주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가족사진을 찍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부모님은 요즘 같이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족사진을 찍는 게 아마 더 낯설었을 것이다. 아빠는 마치 태어나서 웃어본 적 없는 사람 같았고,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했다. 엄마는 아빠와의 다정한 포즈를 원하시는 작가님의 요청에 소스라치게 놀라기까지 했다. 결국 작가님의 재치와 노력 끝에 한참 후 우리는 모두가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엄마 아빠의 영정 사진을 찍을 순서가 되었다. 아빠는 이미 이것저것 찾아봤는지 요즘은 대각선 구도로도 찍더라, 이렇게 하면 잘 나온다더라 하면서 알아서 포즈를 취했고, 꽤 수월하게 금방 사진을 찍었다. 반면 엄마는 오랜만에 찍는 단독 사진이 어색하고 어려웠는지 사진작가님의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아빠는 작가님 옆에 바짝 붙어서 잔소리를 겸한 코칭을 거들었고 나는 멀찍이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 영정 사진에 대해 얘기할 때만 해도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그래, 찍어둬서 나쁠 건 없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촬영을 예약했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포즈를 잡는 아빠와 사진작가님의 말에 따라 자세와 표정을 잡으며 점차 진지해지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피며 엄마의 사진이 최대한 잘 나오게 하려고 애쓰는 아빠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콧등이 시큰거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
종종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의 삶을 상상하곤 했다. 부모님의 기일은 어떻게 보낼 것이며, 화장을 한다면 어떻게 보관할 것이고 등등.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막연하게 그려본 것이지 그런 상상을 하면서도 그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올 거라 실감하진 못했었나 보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서 언젠가는 정말 다가올 마지막 모습을 준비하는 두 사람을 보니 막연했던 부모님의 부재가 현실이 될 거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슬플 거 같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우리 부모님은 대개의 그 시대 경상도 부부처럼 딱히 다정다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지지고 볶은 시간이 더 많았다. 엄마의 고생과 희생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아빠는 엄마의 근심과 주름에 대단한 역할을 했으며 바람 잘 날이 없었던 날들이 많았다. 딸들에게 가장 좋은 아빠는 엄마에게 잘하는 아빠이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자라면서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자의 인생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아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떨칠 수가 없었고, 아빠에 관해서라면 악에 받친 사람처럼 굴었다. 결혼을 왜 했을까, 따로 사는 게 우리 넷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고 확신했던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엮여 지내 온 그 지난한 세월 속에 고군분투했던 두 사람의 관계와 시간을 감히 어떻게 나의 시선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40여 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두 사람은 첫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려 나가다가 둘째도 낳아 기르며 울고 웃고 소리치던 일들을 겪으며, 두 아이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큰 아이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세대가 이어지고 둘째 아이는 당신들이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었다. 그 모든 순간들을 통과한 두 사람 사이의 질긴 인연에 이제 와서 원망과 분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서로의 영정 사진을 위해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뒤로 오랜 시간 마음을 짓누르던 화의 응어리가 반짝이는 겨울의 햇살을 따라 서서히 으스러져 갔다.
고되던 과거를 지나 삶의 후반의 여정을 지나는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보호자가 되고 기댈 곳이 되었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집에서 두 사람은 같이 식사를 하고 투박스러운 말투지만 대화를 하고, 같이 장을 보러 가고 함께 병원을 가고, 약을 타러 간다. 그리고 이제는 다가올 삶의 마지막 순간도 함께 준비한다.
그렇게 고생시킨 남편이지만 그래도 자식보다는 남편이 낫다는 고지식한 엄마도, 따로 표현은 안 하지만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다 한 뒤, 엄마가 먼저 떠나면 산에 들어가서 자식들 안 보고 혼자 살 거라는 아빠의 생각엔 서로에 대한 마음, 인간이 가지는 모든 종류의 감정이 뒤섞여있는, 내가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깊은 마음이 느껴진다.
요즘은 영정 사진이라는 말 대신 장수 사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더 오래 산다는 의미로.
두 분이 지금처럼 투박하게 대화를 하고 각방을 쓰며 각자의 생활 패턴대로 살지만 함께 식사를 하고 장을 보러 가며 함께 텃밭을 가꾸며 오래도록 장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