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tdaal Apr 14. 2023

나 화장 하나도 안 했어

narrative_recipe: 채소팔레트


새로운 식재료에 관한 경험은 새로운 도시나 다른 시간으로 여행함과 같아. 장작으로 구운 토마토로 만든 랠리쉬를 양껏 발라 구운 채소를 올린 채소팔레트는 예쁘고 맛도 있어. 채소는 오늘도 얼굴값을 한다.


꾸미고 꾸며낸 빵


과일잼과 마찬가지로 랠리쉬도 엄청난 양의 설탕이 들어가더라고. 그래도 양파와 함께 선택된 채소 (나의 경우는 토마토)가 지배적으로 풍부한 맛과 질감을 뽐내기 때문에 냉동실에서 자고 있는 빵 한 장 어르고 달래 깨워 구워서 이것만 발라도 훌륭하겠더라.


한껏 꾸몄었지만 결국 빈 접시가 가장 예뻐 보이더라


조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의 옷장 속에 옷 색깔은 거의 비슷한 톤과 재질이라 새로 무언가가 생겨도 결이 참 잘 맞아. 왠지 새것 느낌은 나의 기분이 위축되게 만들지. 반짝이고 화사한 옷보다는 닳아서 바랜, 혹은 그런 듯한 옷을 입는 걸 편하게 느껴. 오래되었지만 멋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좋은 재질 (천연소재)의 옷을 꽤 신중하게 골라야 초라해 보이지 않게 낡은 옷을 입을 수 있어. 꾸민 것 같지 않지만 단아하고 자연스럽게 멋 부리는 거야. 멋 안 낸 듯, 툭. 


풀메이크업 준비


두 장의 빵 사이에 이것저것 클래식한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는 눌러버리면 나의 재능을 가려버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의 실패를 숨겨주기도 하거든. 반면 한 장의 빵 위에 재료를 진열하는 오픈 샌드위치는 크기와 색과 위치, 무엇하나 허투루 할 수가 없지.


호밀빵의 진한 색은 채소들의 색채들을 잘 안아주는 팔레트 같아. 그릴에 구운 채소를 이것저것조것그것 올리다 보면 산으로 가다가 하늘까지 갈 수도 있어. 그렇다고 단순하게 조합하는 게 더 쉽다는 건 아니야.


파티 갈 준비 중인 빵 


화장 하나도 안 했어!라는 친구의 얼굴을 보아. 얼굴톤을 맞추려고 바른 비비크림이랑 눈썹 선을 가다듬은 아이브로우, 입술 틴트 이렇게 세 개를 했으나 '색조화장을 안 했다'는 말의 과장법 정도로 알아들으면 돼. 그런 순수한 얼굴에 내 얼굴 들이밀면서 ‘입술 발랐는데?‘라며 반박하는 숨은 그림 찾기 하진 말자. 한 듯 안 한듯한 화장이나, (했는데) 하나도 안 했다고 말하는 화장은 풀메이크업만큼이나 엄청난 기술과 공이 필요하니까. 


몹시 노력한 가을채소 팔레트는 풀메이크업이었어.


홍제천 어느 카페에서 먹었던 호밀빵에 삼각형으로 자른 고트치즈와 꿀을 뿌린 토스트는 충격적이었어. 8년이 지난 일이지만 잊히질 않아. 그저께 산 홀그레인빵을 12조각으로 썰어서 3장은 실온에,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 두었어. 이제 12장의 스케치북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 12개의 얼굴에 어떤 화장을 할지, 그 생각을 하면 요리가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딸기잼과 피넛버터‘처럼 세상 모두가 아는 조합이 아닌 이상 (오픈) 샌드위치를 단순하게, 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만든다는 건 연습과 시간이 필요해. 내일은 빨간 토마토 랠리쉬에 하얀 고트치즈랑 푸른 허브를 송송 올리겠어. 화장한 듯 안 한 듯. 멋을 낸 듯 안 낸 듯.



'화장 안 했어'라고 말하는 고트치즈 꿀 사워도우 토스트는 단순한 조합이지만 예쁜 민낯을 하고 오래 사랑받은 좋은 질의 옷을 툭 걸치고 있어. 


no stress toast 알아서 조립하세요.


tomato relish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함이 편안해


내게 익숙한 조합들:

베지마이트와 버터

낫토와 치즈

아보카도와 마른 고추 플레이크, 레몬

구운 채소와 올리브 타프나드

아스파라거스와 치즈, 레몬

매거진의 이전글 (Don’t) Talk to stranger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