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至賤에 함께 살아가는 것들.
커피를 사랑하는 남자의 걸음을 뒤따라 ‘그로토’라는 카페에 우린 도착했다. 항상 같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형과 멋진 공간에서 커피를 마실 생각에 마냥 들떠 있었다. 그곳엔 필터 커피 메뉴 리스트가 따로 있었는데 그중 핸드드립 방식으로 추출한 게이샤 커피를 마셨다.
형은 잔향과 맛이 오래 남는다는 <롱 애프터>라는 용어를 설명해 주었고 이내 한 입 홀짝 들이키곤 흡족해하며 음미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행복했다. 동시에 마음 한 편에서 알 수 없는 짠한 감정이 잔향처럼 맴돌았는데,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가 커피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청춘을 함께한 바리스타라는 직종 내려놓고 요식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님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십니다. 그렇게 그만두시고 나서 정말 아쉬우셨을 텐데, 왜 그러한 결단을 내리셨나요.”
그러자 그가 답했다.
“바리스타가 되고 좋아하는 커피를 10년간 내리면서 업에 종사하다 보니 내가 매일 마주하는 대중들에게 한 잔의 결과물로 내기까지 담은 전문성, 철학에 대해 알아주길 바랐는데 정작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나에겐 철학은 직업에서 보다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꿈이 동사로 명확해지고 나서부터 내가 무엇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관심과 칭찬으로부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나였기에 어느새 커피를 내리고 있는 내 모습이 무거워져 있었다.
하지만 커피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지천至賤에 두고 상생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지천은 매우 흔한 것을 뜻하는데 일상에 두고 함께 살아가는 것, 커피를 업으로 종사하지 않아도 항상 곁에 두고 내리고 마시는 것.
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공부를 하고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공간에 대해 관찰하고 여러 바리스타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이 내린 커피를 마시며 노는 것이다. 그렇게 곁에 함께 살아가며 내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커피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건넨 답변은 내 생에 들었던 답변 중에 가장 현명하고 감명 깊고 위대한 답변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가장 아픈 기억을 건드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했었는데, 그의 표정에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커피에 대한 미련과 상실감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펼쳐진 우주 속에서 큰 별 하나가 폭발하여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한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던 견해와 깨달음들, 그리고 전반적인 삶을 통틀어 내 주위의 지천에 상생하며 살아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또 다른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깨달았던 부분과 그땐 몰랐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꿈을 크게 가져라 깨져도 그 조각이 크니.>라는 동기부여의 주제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어록이 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꿈이라는 유리조각이 깨졌을 때 주위에 떨어진 잔해들을 보며 상실감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잠식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의 업을 내려놓아야 할 순간을 맞이했을 때,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내려놓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미련과 상실감을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의 파편들을 쓸어 담아야 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날카로운 감정들에 찔리고 베이며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와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얻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곤 흉터를 보며 미련스럽게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유리가 깨지기 전에 나뭇가지가 뻗쳐 나간 듯한 금의 모양이 자신에게 길을 안내하는 나침羅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설령 깨졌더라도 분산된 조각들이 큰 꿈에서 파생된 각가지의 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렇게 꿈은 큰 꿈에서 태어나고 작은 꿈들은 큰 꿈으로 자라나 또 작은 꿈들을 낳는다.
꿈과 예술은 어쩌면 흩어지기 위해 있는 존재라고 설파하는 것이 옳은 문맥이겠다. 꿈에겐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꿈들을 태어나게 하고, 새로운 존재들을 창조해내기 위해 하나에서 여럿으로 흩어져야 하는 ‘필연적 파생‘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운명적인 계기로 인간의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없는, 때가 되면 흩어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상징하는, 내지는 전부인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 그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내려놓는다.’가 아닌 ‘넣어둔다.’가 더 나은 표현이 될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넣어두면 잘 익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지천에 두고 함께 살아가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키워 나갈 수 있다. 그렇게 끝없이 생각하고 느끼며 우리의 변두리에서 함께 무르익어간다, 하지만 자아마저 놓아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넣어두고 함께 살아가며 익힐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손아귀를 벌려서 그것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방생시킬 것인지 본인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때가 되면 떠날 것에게 발목 잡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즐겁게 즐기며 벗과 함께 하듯 살아가면 된다. 넣어둘지, 내려둘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포기라는 단어의 정의대로 따라가지 않고 꿈과 함께 살아가라. 내적으로 완전히 내려놓은 삶과 더불어 미련함에 끝끝내 놓지 못하는 삶에 벗어나라.
삶의 전부가 되진 못하더라도 당신이 진정히 사랑하는 것이라면 지천에 두고 함께 살아가라.
언젠간 빛을 발할 것이고 기회가 찾아오면 주저 없이 붙잡아서 증명하라. 그 조각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잔해의 알갱이들에게 비치는 빛의 아름다운 색깔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구비했으면 한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작은 꿈들을 위해서. 이것은 내가 세상을 향해 감히 내던지는 시위이자 메시지이다.
끝으로 난 지천(至賤)이라는 단어를 새로이 정의하려 한다. 지극히 천하고 매우 흔한 것을 지천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한다. 내가 감히 정의하고 싶은 지천(地天)의 새로운 뜻은 땅과 하늘이다. 우리 주변에서 지극히 평범한 것들에서도 꿈과 예술은 존재한다. 땅에서 태어나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같이 태어난 꿈과 예술과 함께 살아간다.
지천에 머무르며 함께 살아가는 조각들을 살펴본다. 그 파편들 사이에 알갱이들이 반짝이는 빛들을 보며 새로이 얻고 살아간다. 다행이다. 어쩌면 한평생 깨우치지 못하고 억겁의 시간 속에 녹아들 수 있었는데, 선물의 의미를 늦지 않고 깨달아서 다행이다. 언젠간 다시 빛을 발할 소중한 조각들을 마음속 내 보물 상자에 고이 담아둬야겠다.
함께 살아가겠다.
-추신
간간이 커피 한 잔 할 때면
떠오르는 그대를 위해
마음의 잔에 살며시 부딪히곤 합니다.
항상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정말 행복한 앞날로만 가득 찰 겁니다.
지혜롭고
명예로운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