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수능 02.

첫 수능-2.

by 반반

책 읽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19살 한 해 읽은 책 목록을 적어둔 수첩이 아직 남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여름 방학 중 재독 했다고 써 놓았다. 수험생이 일 년간 입시와 무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12권 읽었다면 지금 내가 보기에도 얘는 공부를 하긴 한 건가 싶다. 고2 때까지는 피씨통신 락동호회에서 또래 아이들과 음악이나 소설이야기를 하는데 미쳐있었다. 고3 시작 무렵 해당 온라인 서비스가 종료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음 잡고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에 매일 참석했다. 학원에는 다니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한 시간 남짓을 원거리 통학 중이어서 이러나저러나 고되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3년 중 마지막 1년은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다. 평소 평일에 열심히 공부를 다 마치고 주말에나 시험기간에만 놀았다. 미리 시험공부를 마치고는 일찍 끝나는 날 엄마와 노래방에 갔다. 내가 이런저런 팝송을 부르면 엄마는 옆에 앉아 묵묵히 들어주었다. 노래방 운영자는 한 시간이 지나도 십 분씩 감질나게 계속 서비스 시간을 주었다. 목이 아프고 지칠 만큼 노래를 부르고 나서 집에 돌아가 다음 날 시험 범위를 몇 번 더 훑어본 뒤 평소와 다름없이 12시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은 내신 준비와 수능 준비를 별도로 생각했다.

난 수능파라서 내신은 신경 안 써.

서울대 안 갈거라 국영수만 신경 쓰면 돼.

이미 2학년 때까지 내신 시험을 엉망으로 봐서 가망이 없다 생각한 친구들이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입시 정보에 까막눈이었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고등학교 2학년까지 음악에 미쳐 매일 방에서,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만 불러 젖히던 나는 내신 성적이 반 1등에서 반 10등까지 널뛰기를 했다. 석차는 최상위가 아니어도 평어가 수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만 공부를 했다.

그러던 내가 고3 시작부터 꾸준하게 무슨 과목이든 고루 반복해서 학습하기 시작했다. 이후 내신 성적은 문과 전교 1,2,3등 사이를 거의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총점을 따졌을 때 일이고, 주로 한문, 화학1, 생물1처럼 수능파 아이들이 주요 과목이 아니라고 버려둔 과목을 꼼꼼히 공부한 덕이었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탐구처럼 수능을 볼 과목들은 이전 학년보다는 나아졌지만 실수로 한 두 개를 틀릴 때가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도 내신에 비하면 석차가 그리 높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 중 저녁 식사를 마친 나를 담임교사가 불러냈다. 어둑한 운동장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사월 무렵이었다. 함께 운동장 가를 걸으며, 3, 4월 모의고사 성적에 대해 담임은 내게 해줄 말이 있어서 불렀다고 했다.


지금 정도 모의고사 성적이면 아마 정시에서 서강대 정도는 지원해 볼 수 있을 거야. 연고대는 많이 어려운 수준이야. 그래서 말인데, 1학기 수시로 연세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 그것도 크게 가능성이 있지는 않지만 말이야.


나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고등학교에 서열이 있는 신도시였고, 그래서 상위권 학생 중 수십 명은 소위 SKY라 부르던 상위 대학에 매년 진학하고 있었다. 재수생이 포함된 숫자였지만 평준화 지역 일반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 하나가 겨우겨우 서울 상위 대학에 가는 것에 비하면 입결이 좋은 학교였다. 그런데 그런 무리에 내가 속할 가능성이 없다니… 나름 열심히 해서 석차를 많이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더 고민해 보겠다고 담임에게 말하고는 1학기 수시는 쓰지 않기로 했다. 2학기에 고려대 언론학부 수시 정도는 쓰고 싶다고 했다. 신문방송학, 언론미디어학부, 광고홍보학과에 관심이 있었다. 기왕이면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 가면 좋겠다 싶었지만, 목표가 높았는지 모의고사 성적표의 가상 지원 서비스에서는 합격이 어렵다는 문구만 확인했다.


정신을 다잡고 조금 더 집중해서 공부하고 성적을 관리하기로 했다. 여름방학에는 통학시간을 아끼려고 자율학습에 참석하는 대신 집 근처에 독서실을 잡아서 나갔다. 컴퓨터를 켜고 싶은 욕구를 누르기는 많이 어려워서 집에 눌러앉은 날도 많았다. 여름을 어찌어찌 보내고 개학이 다가오고,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하자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았다. 주중에는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주말에는 독서실에 가면서 문제집을 열심히 풀었다. 수학 성적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았다.


추석 다음 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추석날 할머니가 밭에 간 사이 자식 손주들이 전부 돌아가버려서 다음날 너무 서운하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토로하시던 게 처음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마치 뭔가 마지막이 다가온 것처럼 할머니는 제대로 작별 인사 나누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셨다고. 그러고 나서 일주일 뒤 파마를 하러 우리 집이 있던 읍내에 나오신 할머니는, 엄마를 만나러 들러서는 평소와 달리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없이 건네고, 걱정거리와 당부 같은 것도 말하면서 자리를 뜰 생각을 안 하셨다고 했다. 당장 점심을 싸다 운영하던 가게에 가져가지 않으면 성을 낼 아빠를 생각하며 엄마는 할머니를 적당히 돌려보냈는데, 할머니는 계속 돌아보면서 결국 파마를 해줄 미용실 쪽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할머니댁 뒤꼍 논으로 가는 밭길 옆에 할머니는 차디차게 식은 채 발견되었다. 일어나려 몸부림친 듯 옷과 손발이 흙투성이였다고, 마지막 길 곱게 단장하듯 잘 말린 파마머리를 한 채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빠는 슬픔과 분노로 미쳐버린 듯했다. 아빠는 이미 5-6년 전 조현병 발발,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던 전력이 있었다. 남들은 일상생활로 복귀한 게 기적이라 말했지만, 아빠는 부작용을 심하게 겪던 정신과약 대신 알코올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자신만 버텼지 그 뒷감당은 가족들이 해야 했다. 원래도 심한 술주정이 있던 아빠는 엄마에게 점점 더 폭언과 폭력의 강도를 높여갔다. 홀로 남은 할아버지 먹거리를 성의껏 차리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겨우 찌개 나부랭이 나물 따위를 가져다 드리는 걸 보면 피눈물이 난다는 소리를 했다. 엄마는 가게 운영과 아빠 점심밥 대령과 할아버지 한 주 치 먹거리 준비까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3인 나까지 학기 초에는 도시락을 두 개씩 챙겨 주었다.

급식이 너무 별로여서 도시락을 먹던 나는 더 이상 엄마 고생 시키면 안 되겠다 싶어서 급식 신청을 했다. 급식은 정말 형편없었다. 같이 밥 먹는 친구들과 점심 식사가 좀 잘 나오면 저녁 식사는 망한다, 조삼모사, 이러고 빵 터진 웃음 속에 분노를 느꼈다. 그날 저녁 잠자리 들기 전 급식 품질에 항의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교장선생님께 드리는 글을 컴퓨터로 작성해서 A4용지에 열 장 안 되게 인쇄했다. 종이도 인쇄기 잉크도 얼마 남지 않아서 몇 장 못했다.

다음 날, 평소보다 30분 일찍 등교에 나선 나는 새벽 6시 반이 안 된 시간 아무도 없는 교정에서 누가 나를 볼 새라 두리번거리며 가져간 스카치테이프로 인쇄물을 여기저기 붙였다. 몇 장 안 돼서 신중해야 했다. 교내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게시판, 교장실 문 앞, 본관 층마다 있는 급식 엘리베이터 앞, 3학년 복도와 교무실 근처.

학교는 한바탕 뒤집어졌고 반 아이들이 인쇄물 한 장을 떼어다 교실로 들어올 땐 잠시 뜨끔했다.


이거 봐! 이상한 애가 뭘 써 붙여 놨어!


다들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신이 난 듯 평소 불만이던 급식을 다시 한 번 욕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집된 학생회의에 불려 가던 학생회장만 볼멘소리를 하며 교장실로 향했다.

스카치테이프에 찍힌 지문 채취를 하는 건 아닌지, 씨씨티비에 이미 내 행적이 다 찍힌 게 아닐지(다행히 그 당시에는 씨씨티비를 설치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회장단들에게 범인을 색출해 오라고 교장이 호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겁을 먹은 채 눈앞의 문제가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회의에 다녀온 같은 반 회장에게 아이들은 눈짓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물었다. 털썩 자리에 앉은 회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너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원하는 거 있으면 다 해 준대.


과연 급식 반찬은 이후 얼마간은 개선되는 느낌이 들었고, 교무부장이나 생활부장이 중식 석식 시간마다 교실을 돌며 밥과 반찬 상태는 좀 어떤지, 맛있는지 형식적으로 묻고 가기도 며칠을 했다. 인쇄물 말미에 ’다시 한번 급식 개선에 힘써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퇴임 전까지 건강하시고 무사하시길 빕니다. -00 청년 폭도 연맹단 올림.‘ 하고 뭔 무장 세력처럼 뻥카를 친 것이 먹힌 것인가 싶어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렇게 내 고3생활은 즐거웠지만,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서 조금 후회했다. 조금 덜 즐겁고 더 열심히 할 것을. 나 평소 모의고사보다 한 이삼십점은 떨어진 것 같은데, 하면서….


서강대도 정말 좋은 대학이지만, 철없던 어린 내 짧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송할 일이지만, SKY라인 바로 건너에 겨우 닿는 나를 생각하며 시험을 마친 나는 엄마가 저녁으로 돈가스를 사준 자리에서도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집에 와서 이비에스를 틀고 가채점을 하는 순간에도 계속 울고 있었다.


얘 입시 망하면 당신 죽여 버릴 거야!


내내 잠자코 당하고만 있던 엄마가 아빠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가채점 수능 성적은 평소 모의고사보다 20점가량 떨어져 있었다. 국어(당시 언어영역) 시험을 보고 난 아이들은 어려웠는지 웅성웅성 걱정스러운 소리를 자기들끼리 주고받고 있었다. 시험실에 같은 학교 아이가 한 명도 배정 안 된 나는 국어는 그다지, 괜찮던데? 하면서 보온병에 담긴 대추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였다. 한 잔도 아닌 한 모금. 지옥문의 시작이었다.

수학 시험 시작 직후부터 너무나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그때는 시험 중 화장실을 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오줌이 너무 마렵고 배가 터질 것 같아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약한 수학 실력인데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과, 그러면 옷에 오줌을 싸버릴 거라는 걱정이 내내 싸웠다. 답안지를 걷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가 한참 오줌을 누면서 눈에서도 줄줄 흘렀다. 점심 먹던 아이들이 수학은 쉽고 어쩌고 떠들어대는 걸 보고 더 속이 상했다.

120분간 진행되는 탐구영역 시험 시간에 또다시 요의가 발동했다. 사회와 과학 여러 과목을 한 번에 보던 시절이었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체념했다. 넋 나간 기분으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설렁설렁 문제들을 풀었다. 80문제. 다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가면서 나는 정말 망했구나, 했다. 외국어영역(현 영어영역)과 제2외국어는 무슨 정신으로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능 본 다음 날, 학교는 초상집 같았다. 아이들이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빈 자리도 제법 눈에 띄었다. 가채점 표를 내밀자 예상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담임교사가 말했다.


너, 수시 1차 붙은 고려대 면접 가지 마라.


옆에서 내 성적을 확인한 전교회장이 거들었다.


야, 넌 눈치 있으면 울지 마라. 다른 애들은 50-60점씩 더 떨어져서 재수한다고 난리야.


그해 나는 고려대 언론학부 수시 1차(면접 안 감), 연세대 인문사회계열, 한양대 법대(추가합격), 서울대 사범대학에 최초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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