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수능 03.

첫 수능은 내 인생을 바꿨을까?

by 반반

솔직히 애가 대학에 꼭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주 나중에, 아빠가 내 합격 사실을 알고는 저런 의문을 던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를 통해서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을까?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엄마는 아빠가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이 너무 막연하고 두려워서 저런 말을 했을 거라고 하셨다. 아빠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농사일이며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다가, 기술을 배워 귀금속 세공사가 되었다. 섬세하고 꼼꼼한 탓에 솜씨가 좋았지만, 고용주와 자주 다퉈서 금세 일을 그만두고 일 년에 몇 달 출근하지 않는 날들이 결혼 초부터 계속되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아빠는 신혼 초부터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와 같이 산 지 사흘 만에 와이셔츠 자락을 찢어 발기며 단추를 뜯어 흩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다. 엄마는 일찌감치 이혼을 생각했지만 뱃속에 내가 생겨난 걸 이내 아셨고, 혼인 열 달 만에 나를 낳았다. 그렇게 불행한 삶은 이십삼 년 간 계속되었다.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뿐 아니라,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조현병이 발발했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다 강제 입원을 했고, 잠시 퇴원했을 때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 시도를 했고, 겨우 살아나서는 다시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다. 이후로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지 않을 때도 가족들에게 사소한 일들로 트집을 잡거나 화를 내고, 때때로 엄마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붓거나 집안 살림살이들을 부쉈다. 내게 사 준 컴퓨터 모니터를 사흘 만에 집어던져 부수고, 가족들이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내민 열쇠를 받는 대신 망치로 문고리를 내려쳐 부수고, 현관 유리를 주먹으로 깨고,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망치로 브라운관을 깨버렸다. 토르의 후예인가 망치를 너무 좋아하셨다. 그런 장면을 일일이 지켜보던 나와 동생은 자주 놀랐고, 언제 또 아빠가 물건을 부수거나 화를 내거나 엄마를 괴롭힐지 몰라 내내 불안했다. 나는 밤에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외부 소음에 아주 민감하고, (술이나 담배, 화재 등등의)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이 되었다. 식칼로 가스레인지 상판을 내려찍고, 라이터 부싯돌을 바닥에 굴려 틱틱 소리를 내며 여전히 취해 있는 아빠를 보다 보면 우리 가족이 언제 죽어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린 내가 도피한 세상은 공부와 책 읽기, 그리고 글쓰기였다. 그날 있던 일을 일기로 남기는 것이 마음을 추스르는데 약간은 도움이 되었다. 글로 적어버리고 난 뒤 다시 읽어 보면, 내게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다른 작가가 쓴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겪은 일들도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에 폭력 장면 밖 다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아빠, 늘 우울한 엄마는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고, 따뜻한 위로나 다독임은커녕 울거나 외롭거나 힘들다는 신호인 내 말과 정서적 표현에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해주지 못했다.


반면 학교에서 시험을 잘 보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기뻐하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다. 내가 받은 상장으로 방의 한 벽면 전체를 도배하고, 친구와 친척에게 이번에도 올백이야, 자랑하고, 주변의 시기와 질투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예뻐했고, 심부름을 시키거나 임원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신뢰를 표시했고, 일기 검사를 하면서 내 일기 읽는 것이 제일 기대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과 일기장을 연재물처럼 돌려본다는 담임 선생님도 계셨다. 일기 독자 선생님 중에는 내게 ‘소피의 세계’ 같은 청소년용 철학 도서를 권해주거나, 최인호의 에세이, 정채봉의 동화집 같은 것을 선물해 주신 분도 계셨다.


처음 독자가 생긴 나는 누군가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이 기뻤고, 중학교 때까지 방학 숙제로 일기 검사가 계속되었지만 일기 쓰는 일이 내내 즐거웠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 중에도 내 일기가 재미있다고 교무실에 따로 불러 이야기해 주신 분이 계셨다. 그래서 더 이상 누구에게 읽히지 않게 된 시절에도 열심히, 문장을 뽐내가며 일기를 썼다. 일기뿐 아니라 독후감 쓰는 것도 즐겨했다. 책을 읽고 책 속 주인공에게 편지를 쓰거나, 읽은 책을 다른 동화로 꾸며 요약하고, 책 이후의 뒷부분을 상상해서 쓰고, 만화를 그리기도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듯 독후감을 쓰곤 했다. 교내외 글짓기 대회나 독후감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면서 보상을 받는 느낌도 들었다.


입시의 성공은 이런 학창 시절의 정점이 되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입시 컨설팅을 받지 않고도 논술 시험과 자기소개서 작성, 면접 등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12년 간 꾸준히 스스로 해 온 공부와 글쓰기가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입시가 모두 끝나고 합격 발표가 난 이후,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사이에 둔 겨울날, 처음 가출을 했다. 아빠에게 술 좀 그만 드시라는 편지를 남긴 채였다. 고3 내내 역사 공부를 할 때, 국어 비문학 지문을 읽을 때 알게 된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 보고 싶었다. 피씨통신 동호회에서 알게 된 동갑 친구가 사는 동네이기도 했다. 무궁화 열차를 타고 내려간 영주시에서 2박 3일을 부석사와 인근 지역을 돌아보는 데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부모님께 야단맞을 걱정을 했지만, 막상 나와 다시 만난 부모님은 아무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건가 싶었다.


대학 생활 중에도 가출은 반복되었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엄마를 때리는 걸 말리는 나에게 아빠가 한 말은 감히 아빠에게 대들어? 같은 게 아니었다.

네가 서울대 다니면 다냐?


그 말과 함께 아빠는 나에게도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맞은 나는 참지 않고 집에서 나가 며칠 동안 선배들 집을 전전하며 배회하였다. 아빠는 나를 찾아 학교 학생회관에 있는 동아리방까지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선배들이 동아리방엔 오지 마, 네 아빠가 찾아왔어, 하면서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아빠의 심한 폭력을 피해 엄마와 동생과 밤거리로 도망쳐 나온 날이었다. 모텔 방을 겨우 잡아 걸쇠도 제대로 잠기지 않는 방에서 덜덜 떨며 하룻밤을 보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엄마와 나는 집 뒤편 창고에 조금씩 세간을 빼돌리며 짐을 쌌고, 나는 학교 근처에 월세방을 구했다. 아빠가 집을 잠시 비운 날, 용달차를 불러 미리 싸 둔 짐을 챙겨 서울로 향했다. 엄마와 나는 주방도 딸리지 않은, 화장실과 방 한 칸 있는 원룸에서 두어 달을 지냈다.

엄마와 나의 가출은 처음 계획이었던 이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엄마는 먹고살 길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잘하겠다는,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자는 아빠의 회유에 못 이겨 엄마는 울면서 고향집으로 돌아갔고, 가출은 내 자취방을 구하는 해프닝처럼 마무리되었다.


아빠를 떠나, 엄마와 서울로 올라올 결심을 하는 데는 나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한 것은 과외 교사로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시험을 통과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일 년 간 돈을 모았고, 부모에게 용돈 한 푼 받지 않고 대학 1년을 보냈다. 학교 공부를 하면서 생활을 꾸려가는 것도 힘들지만 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내 독립에 가까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나는 생활비와 월세를 벌기 위해 과외 수업을 계속해야 했다. 갑자기 일자리가 끊기는 달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새로운 가르칠 학생을 구했고, 중개업체에서는 첫 달 수업료의 절반을 수수료로 챙겨갔다. 중간에 아토피성 피부염이 너무 심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시절에는 일을 할 수 없었고, 학교에 나가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피부질환 때문에 세상을 등진 유명인의 기사를 보며 슬프지만 공감할 수 있었다. 어떤 질환은 삶을 망치다 못해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아픈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몇 달간 손을 벌려야 했고, 아빠는 돈을 주는 만큼 굴욕감도 함께 주었다. 학교 앞에서 살면서도 겨우 겨우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나에게 월세가 아까우니 집으로 들어오라고,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통학을 하라고, 계속 돈을 대 줄 수는 없다고 협박을 했다.

다행히도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벌이를 하면서 부모에게 신세 지거나 간섭받는 시간은 잠시 멀어졌다. 그러나 졸업반이 되면서 부모가 집을 구입했고, 내 방과 동생 방이 따로 있는 새 집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내 월세방의 보증금을 빼서 새 집 구입에 보태라고 아빠는 말했다. 별 수 없이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다시 원가정의 가족과 함께 살며 두 시간 가까운 통학 시간을 길에 버려야 했고, 졸업예정자로 임용고사를 준비했다. 부족한 시간과 체력 탓도 있지만, 소홀히 한 공부 탓에 첫 시험에서 낙방했다.

부모의 새 집에서 딱 일 년을 살았다. 졸업 후 반년 동안 독서실을 다니며 과외를 해서 용돈 벌이를 했다. 아빠는 내가 과외 수업과 장학금으로 모은 보증금 오백만 원을 가져간 뒤 돌려주지 않았다. 집을 나갈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시도로 읽혔다. 새 집에 이사 간 뒤로도 아빠의 주정은 점점 심해졌고, 술을 먹고 택시에 토해서 항의하는 기사에게 엄마가 돈을 물어주자 엄마를 때렸다. 잔뜩 취한 채 집에 돌아와서도 소주를 물처럼 밤새 마시고 잠을 안 자고 엄마를 재우지도 않으면서 욕설을 하고 괴롭혔다. 엄마 듣는 데서 엄마의 엄마와 엄마의 오빠들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엄마에게 하는 욕설들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덜덜 떨면서 휴대전화에 아빠의 주폭을 녹음해 놓기도 했다.

유독 주정이 심했던 어느 밤이었다. 새벽이었나. 지친 엄마는 불 꺼진 거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곁에 다가가 아빠가 잠들었는지 물었다.

거기서 무슨 작당들이야.

잠이 든 줄 알았던 아빠는 어느새 안방에서 나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엄마 옆에 앉더니 엄마의 안경을 벗겼다. 곧 벌어질 장면이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내가 아빠의 팔뚝을 밀어젖혔다. 노려보는 아빠를 함께 노려보며 아빠의 팔뚝을 세게 때렸다. 화가 난 아빠는 나를 때리는 대신 엄마를 때렸다. 붙들고 말리는 나를 뿌리치고 아빠는 엄마를 집어 들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엄마는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졌다. 엄마를 계속 때리려는 아빠를 붙잡다가 내 팔이 비틀리고 까지고, 한참 누워 있던 엄마는 정신을 차렸는지 일어나서 청소기를 집어 들고 아빠의 몸을 내리쳤다.

죽어, 죽어!!!

나는 울면서 전화기를 챙겨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옆집 문을 두드리며 도와주세요, 울면서 말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래층에 내려가서도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기척이 없었다. 전화기를 열고 112와 119를 눌러 차례로 신고를 했다. 경찰이 온 사이 정신이 없어 아무 말 못 하고 멍하게 있는 엄마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구급차가 엄마와 나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 응급실의 의료진은 이상하게 냉담했다. 약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기분도 들었다.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고 하니 무슨 촬영을 할 건지 말 건지 물으며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집에서 지갑은커녕 내 전화기 한 대만 달랑 들고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상태였다. 경찰에서 전화가 왔고, 아빠도 청소기에 맞아 다친 상태라 병원에 데려간다고 해서 우리가 입원한 곳이 아닌 다른 응급실로 이송해 주길 부탁했다. 외삼촌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어떻게 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모가 와서 응급실 퇴원비를 지불해 주고, 나와 엄마는 아빠가 병원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내 통장에는 딱 1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통장과 당장 공부할 책들을 큰 가방에 챙겼다. 옷가지는 챙겨갈 여유가 없었다. 엄마도 신분증과 손에 닿는 것만 대충 챙겨 짐을 쌌다. 이모차를 타고 이모집으로 향했다. 하루 이틀 정도 신세를 지면서 다니던 학교 근처에서 엄마와 방을 구하러 다녔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에어컨 5만 원). 내가 가진 13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반지하방을 얻었다. 에어컨을 달아주면 월세 5만 원씩을 더 받겠다고 해서 그냥 살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창고에서 낡은 선풍기를 가져다가 빌려주었다. 찌는 8월의 여름날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하던 과외 학생 부모님들께 수업을 중단하게 되었다고 연락하고, 일부 금액을 환불하기로 하고, 서울 인근 안양에서 당장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중개업소에서는 고향에 갔다면서요? 하고 처음에는 냉랭하다가 이내 첫 수업료 절반을 떼고 과외 두 개를 구해 주었다. 그 여름부터 12월 두 번째 임용고사까지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고, 엄마는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아이 돌보는 교육을 받은 뒤 초등학생들 하원 도우미 일을 했다. 나중에는 직장에 나간 엄마 대신 아주 어린 아기를 풀타임으로 돌보는 일을 시작하셨다.

두 번째 임용고사는 첫 해 보다 더 많이 어려웠다. 함께 시험을 본 친구들이 모두 좌절한 표정으로 시험장 밖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나는 시험에 떨어졌다고 확신하고 그때부터 사립학교 취업에 뛰어들었다. 30여 군데 학교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반지하에서는 겨울 결로 때문에 벽에 곰팡이가 솟아났고, 아토피성 피부염이 심해졌다. 그래서 서울의 반지하에 엄마를 두고 김포에 있는 이모집에서 사립학교 지원과 취업 시험을 보고, 여차하면 일반 기업에라도 취업하겠다고 토익책을 사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큰 기대 없이 1차 시험 발표일 밤에 문득 오늘이 발표날인 것이 생각이 났다. 밤중에 이모집의 컴퓨터를 켰지만 웬일인지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수험번호와 개인정보를 알려주며 결과를 확인해 달라고, 어차피 불합격이겠지만, 하고 부탁했다.

너 합격했대!

1차 시험이 끝난 지 한 달쯤 지난 후였다. 2차 시험까지 열흘 남짓 남아있었다. 바로 다음날에는 서류 전형을 통과한 사립학교의 면접이 있었다. 2차 시험 준비를 하지 않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허비한 시간들이 너무 아쉬웠다. 사립학교 면접에서는 어제 발표한 1차 시험의 합격 여부를 묻고는, 임용 고사에 최종합격을 하고도 저희 학교에 올 생각이 있나요? 하는 질문을 했고, 나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꼭 이 학교에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김포 이모집으로 돌아가기 전 배가 고파 면접 본 학교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학교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조심스레 1차 합격 여부를 묻더니 동기는 내게 제안했다. 2차 준비하던 친구들 중 (몇몇이 불합격하여) 이제 셋이 남았는데, 혹시 같이 논술과 면접을 준비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아무런 준비도 못하던 나에게 동기와 선배로 구성된 스터디 모임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모임 구성원들은 내가 들어오자 또 다른 활기가 생겼다고 나를 다독여 주었고, 내 논술문을 첨삭하면서 문장이 물냉면처럼 시원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실제 면접시험을 보듯 서로 번갈아가며 모의 면접을 진행했는데, 이것이 2차 시험에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차 시험을 준비하던 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이만큼 공부해 본 적이 이전에도 없다 싶게 그 열흘 남짓을 낮에는 스터디 모임에서, 밤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2차 시험은 남자친구와 피씨방에서 결과를 확인했는데, 11명 뽑는 내 교과에서 8등으로 합격했다. 둘은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다시 손을 맞잡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나는 공무원이자 교사가 되었고, 엄마의 이혼 소송을 도울 수 있었다. 박봉이지만 생활을 꾸려나가고, 반지하를 벗어나 조금 더 높은 층수의 원룸, 투룸을 거치며 살림살이를 조금씩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수입이 생겼다. 직업이 생기자 조금 더 큰 방을 구하는데 필요한 보증금을 대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애가 대학에 꼭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빠의 물음은 그때 정말 의구심이었다기보다 두려움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좋은 수능 성적은 어려운 환경에 있었던 나에게 대학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 날개는 국가시험을 치를 자격증이라는 것도 함께 붙어 있어서 언젠가 내가 엄마를 데리고 도망칠까 봐, 아빠는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나 나와 엄마에게서 경제권을 빼앗고, 벌어둔 돈을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도망칠 게 두렵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정을 지켰어야 하는데, 아빠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방향으로 점점 더 자신과 가족들을 몰아갔고, 끝내 엄마와 자녀들을 잃게 되었다.

수능을 잘 보지 못해도 인생이 잘못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 정말 맞다고 생각한다. 수능을 잘 본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폭력과 불안으로 얼룩진 원가정에서 엄마를 구출하고 나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을 수능과 대학이 건네주었다. 고소득의 직업은 아니지만 남들이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하는 그 일을 내가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고려해 본 것은 대학 입시 원서를 쓰면서 너, 내 후계자가 돼라, 사범대 쓰자, 하던 고3담임 선생님의 제안을 들은 때가 처음이었다. 대학 3학년 때 크게 아프지 않았다면, 부모의 불화로 어서 빨리 독립된 생활을 꾸릴 직업을 찾아야 할 동기가 없었다면, 나는 다른 분야의 일터를 탐색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초임 교사 시절부터 깨달았다. 나는 교직과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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