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은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난 여길 떠나고 싶어’의 순간 중 몇 가지를 적어보기로 한다.
1. 겨울이었다. 생활기록부 마무리로 바쁜 학년 말, 갑자기 지방에 있는 시범학교로 전체 교직원 연수를 간다는 공지가 날아왔다. 예정에도 없던 연수라 껄쩍지근했다. 특별 사업의 예산이 남아서 급하게 소진하기 위한 이벤트처럼 보였다. 가까운 곳에도 시찰할 학교는 많았고, 버스 대절 비용 등을 아껴 차라리 필요한 기자재 구입에 예산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 싶어 생각한 대로 먼 곳 연수대신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고 전체 메시지를 돌렸다.
당장에 교감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심한 말도 서슴지 않아 여러 번 다툰 관리자라서 일단 녹음기를 켜고 따라간 곳은 빈 특별교실이었다. 전체 메시지를 보낸 일로 교장 선생님과 교무부장님이 나를 보자고 하신다고 말했다. 굳이 남들 안 보는 곳까지 불러서 그 말을 전하는 게 이상했다. 너 이제 큰일 났다, 하는 분위기는 덤.
교장 선생님은 자신은 절대로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운을 떼셨다. 갑자기 연수를 기획하게 된 건 교무부장의 의견이었고, 학교의 사정이 있으니 이해하라고도 하셨다.
마지막으로 불려 간 자리에서 교무부장은 노여운 얼굴로 대뜸 호통부터 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렇게 전체 쪽지를 돌리는 걸 먼저 배워가지고,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투였다. 처음 메시지 받았을 때는 전체 교원 필수 참석인 것처럼 읽혔는데, 교무부장은 그런 게 아니라고,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안 끌고 가니까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여기저기 조리돌림을 당한 나를 본 내 소속부서 부장교사는 한참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부장회의에서 다들 연수에 반대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해서, 젊은 내가 홀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다 뒤집어쓰게 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교무부장 말대로 연수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껄끄러운 상황이 싫어서 고분고분 단축수업을 마치고 충청도 어딘가의 학교로 향하는 대절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뿐 내리던 눈송이는 점차 눈발이 강해지더니 눈보라로 바뀌었다. 눈길에 버스 안의 사람들 고생하겠다 싶었다.
다음 날, 버스에 올랐던 동료교사가 온갖 불만을 쏟아냈다. 한 시간 반이면 갈 거리였는데 악천후로 왕복 대여섯 시간을 버스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내려갔으면 목적대로 시범학교를 꼼꼼히 보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동 시간이 너무 소요되었다는 이유로 시찰은 삼십 분도 채 안 되게,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다시 버스로 돌아와 귀경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왔다 갔다 한 건지 모르겠다고, 선생님 말대로 같은 도시의 학교를 견학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더 나이 든 경력교사들은 연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괜히 카산드라처럼 미리 연수에 초를 친 사람이 된 기분이라 입맛이 썼다.
2. 학부모총회날,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한 한 어머니는 대뜸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카톡 프사가 실물보다 낫네요.
초면에 그런 말을 들으니 심장이 두근거렸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 이후로 카톡을 탈퇴하고는 지금까지도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 휴대전화 문자로만 학생이나 학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 어머니의 아이는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사안들과 학교폭력 사건을 일으켜서 담임인 나와 생활지도부 선생님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아이를 지도할라치면 어머니는 내 남편이 검사인데 학교를 고소하겠다는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왔다.
3. 코로나19 유행 시절, 새로 옮긴 학교는 원래부터 시스템이 엉망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관내 교사들이 전입을 꺼리는 곳이었다. 실제로 업무분장은 소수 교사에게 담임과 동시에 과중한 업무를 몰아주는 식으로 짜인 채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자리는 주로 신규 교사나 전입 교사, 계약직 교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런 자리인 걸 알면서도 처음 가는 학교에서 괜히 책잡히고 싶지 않아 교감 선생님이 제안하는 업무를 수락했다. 담임이지만 학년부에 속하지 않는 사안담당교사. 신학기 준비를 위해 봄방학 중 모인 자리에서 업무분장표를 보니 기존에 나에게 보여준 것과 전혀 다르게 업무가 추가되거나 섞이고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교무실이 울리도록 교감 선생님께 항의를 하고, 어려운 자리인 걸 알고도 수락했더니 이렇게 사람을 기만하냐고, 업무 분장도 기존 교사들이 새로 오는 교사들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큰소리로 따지면서 울었다. 그렇게 첫 시작부터 망했다. 교감 선생님은 작년 분장표가 잘못 나간 거라고 하면서 다시 수정된 표를 줬는데, 전입일에 처음 받은 분장표에는 생활안전부장에게 있던 사안 1을 다 빼서 나에게 몰아준 걸 보고 다시 항의해서 원래대로 바꿔놓으라고 했다.
내가 모시게 된 부장은 교감 연수를 받는 해였고, 코로나로 원격수업이 시작된 무렵, 부모님 건강이 안 좋아 한동안 출근을 할 수 없다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원격수업 콘텐츠는 동 교과 젊은 계약직 교사에게 다 올리도록 밀어두었다. 사안이 발생하면 조사며 서류 작성은 모두 나에게 미뤘고, 일 처리 과정도 제대로 몰랐다. 내가 서류부터 기안문 내용까지 모두 작성해 보내주면서 기안만이라도 학교폭력담당교사이시니 직접 올리시라고 하면 그제야 일을 하는 시늉을 했다. 징계받게 된 학생의 학부모 특별교육을 잡아놓고는 교육을 담당할 본인이 당일에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 교육 장소에 나온 학부모님이 잠긴 문 앞에 오래도록 서 있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저지르는 학교폭력의 내용은 치졸했고 끔찍했다. 글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한 성적인 내용, 부모를 욕보이는 패드립을 치는 내용이 진술서와 SNS캡처 화면에 난무했다. 아이들은 친한 듯하다가도 수틀리면 서로 욕을 하고, 상대가 가장 상처받는 방식을 어디서 배운 것처럼 날카롭게 이용해 휘두르고 다녔다. 당한 아이도 나중에는 또 다른 아이에게 자기가 당한 방식과 거의 흡사하게 남에게 나쁜 행동과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짓말은 기본이었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듭 내려놓았다.
새로 전입해서 학교 시스템을 잘 모르거나, 신규 교사이거나, 계약직 교사여서 불만을 제기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이런저런 업무들이 맡겨졌다. 업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할, 새로 일 맡은 사람에게 가르쳐주며 일을 시켜야 할 부장교사 중 많은 사람들이 나는 모른다고, 그건 계원인 당신이 할 일 아니냐고, 어떤 부장은 작년도 기안문을 검색해서 알아서 하라고 선을 긋고는 조퇴를 쓰고 가버리는 경우도 목격했다.
이대로 버티면 나도 2,3,4,5년 차… 짬이 쌓이면 좀 편한 자리로 저들 떠난 곳에 기어들어갈 수 있겠지. 누군가에게 일을 몰아주면서. 그게 너무 싫었다. 인사자문위원회에 선출되어 특정 소수에게만 과도하게 일이 분배된 업무분장을 갈아엎자고 제안하자 그 뜻은 알겠지만,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니 내년도에 생각해 보자며 묵살했다. 그러고는 대부분 2년 연임하는 인사자문위원회에서 나만 일 년 만에 잘렸다.
일을 배우지도 못한 채 업무와 학급운영과 교과수업 모두를 감당하느라 절절매는 신규교사들을 보면 슬프고 화가 났다. 경력이 쌓여봤자 겨우 저렇게 남에게 일이나 떠넘기고 자기만 편한 비겁한 어른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내가 속한 조직이 점점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내가 휴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젊은 선생님들이 여럿 돌아가신 소식을 뉴스에서 들었다. 이미 예견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세 학교를 돌면서 매번 모두가 부럽다 하는 교직이나 조직 생활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젊다는 이유로 일을 몰아주거나 내 일도 아닌 걸 뭣도 몰라서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이의를 제기해도 젊은 게 버릇없다고 묵살당하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난 맛없는 급식을 조금씩 겨우 삼키면서 속으로 크라잉넛의 ‘갈매기’란 노래를 자주자주 불렀다.
난 여길 떠나고 싶어. 난 여길 떠나가야 해. 내가 아닌 날 버리고 이제는 떠나고 싶어 이제는 떠나가야 해.
퇴근 후 일과는 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며 보냈다. 그게 유일한 낙이였다. 소설도 좋고, 에세이도 좋고, 인문사회 교양서도, 만화책도, 과학교양서도 좋아했다. 이런저런 과학책 몇 권 봤다고, 문득 고등학교 때 이과로 가지 않아서 과학을 깊이 배우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내 전공은 사회교육이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해 본 적 없는 고등학교 물리, 화학이라도, 그걸 하려면 고등 수학도 같이 해야 할까?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퇴근 후 한두 시간 공원 벤치나 카페에서 수학 교과서의 기본문제들을 풀었다. 혼자 교과서와 지도서를 보며 풀다 보니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몰라도, 다시 수학문제를 푼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그해부터 약학대학이 편입 체제를 끝내고 수능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된 것을 알았다. 기왕 수학 과학 공부를 할 거면 아예 수능을 다시 볼까, 생각을 했다. 대학에 다시 가서, 학과 공부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과외수업은 절대로 안 하고, 첫 대학 시절보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고, 다 할 거야… 막연한 소망이 생겼다.
수능 응시를 결심한 다음 해는 첫 수능을 본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1년 간 열심히 준비한다면, 어떻게 안 될까? 돌아보면 무모하고 순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수능 감독을 나가서 열심히 문제를 붙잡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끔 꿈에서 다시 수능을 보고 있는 나를 보았던 일이 생각났다. 그게 꿈인 것만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궁금했다. 정말 어렵고 힘들던 시절, 학원도 안 다니고 집안은 파탄 나고 생각보다 공부를 많이 못한 것 같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입시가 잘 풀렸는데, 지금처럼 평온한 새 가정에서, 경제적 여유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에서 다시 열심히 공부한다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학기말. 이미 고교 입시를 마친 아이들은 내가 교실로 들어와도 자기들끼리 교실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아서 웃고 떠들거나 과자를 먹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같은 구절을 큰 목소리로 끝없이 반복하며 노래하는 아이들은 제자리에 앉으라는 내 말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다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를 떠날 거야.
가족들에게 내년도부터 휴직을 하고 약대를 목표로 수능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이공계 박사를 취득한 뒤 회사에 다니던 곁의 사람은 하고 싶으면 해야지, 하면서도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해 봐야 알겠지만 생각보다 수학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본인도 거의 십 년 넘게 수학 과학 과외를 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지만, 지금 다시 수능 수학을 하라고 하면 예전에 비해 순발력이나 정확도가 많이 떨어질 거라고. 이런 자기보다도 내가 1년 만에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건 그동안 몰랐던, 수학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거라고(그러니까 그런 일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에둘러서) 했다.
3년 간 수학을 붙들고 있으면서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내가 생각보다 더 수학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거 하나 알려고 참 많은 시간을 수많은 문제들 사이로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