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수능 05.

이렇게 수능 보면 망합니다.

by 반반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첫 수능을 앞둔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그 1-2년 전에 수능을 의무로 보게 하는 게 어떨까? 아니면 수능 20주년 되는 39살에 한 번씩 수능 시험을 다시 보게 한다면? 라떼와 꼰대가 많이 사그라들 것이다.

수능 인터넷 강의 인기 강사를 다룬 기사에 온갖 악성 댓글이 달린 것을 보았다.


-요즘 애들은 사회(과목)까지 학원에 다니고 스스로 하는 게 없어.

-사교육에 미친 에미들이랑 돈독 오른 강사들이 문제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학원은 다니지 않고 학교 수업을 성실히 들었어요. 무료 ebs강의 덕에 제 꿈을 이뤘어요.”

아무도 믿지 않는 거짓말이라 했는데, 아직도 저런 말들을 잊지 않고 수험생과 그 가족들을 나무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화딱지가 났다. 다시 수험 공부 해보든가, 수능이라도 쳐 보시라고요. 어린이들은 가시밭길 내지 지옥불 위를 걷고 있어요.


첫 수능 때 나는 학원은 다니지 않고 학교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성실히 했어요. 인터넷이 잘 안 되던 시절이라 텔레비전으로 ebs강의를 볼 수 있는 교재를 사서 공부했는데, 매번 강의 시간을 놓쳤죠.


20년 전의 수능은 문이과 가리지 않고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합친 시험지의 80문제를 120분 동안 풀었다. 문이과 따라 사탐과 과탐의 선택과목과 비율만 약간 달랐다.


20년 후 내가 본 수능은 30분 동안 과학탐구 20문제를 풀어야 했다. 그렇게 두 개의 선택 과목. 단순 비례로만 따지면 과목당 딱 1/4로 잘랐으니, 그렇게 40문제를 60분 동안 푸니까 뭐가 다른가 싶지만 체감하는 어려움은 비교할 수가 없다.

일단 범위가 줄어든 만큼 난이도는 수직 상승했고, 타임어택은 조건 반사 수준의 순발력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오랜 시간 숙고해서 푸는 게 아니라 번뜩 그때그때 답을 내야 하고, 소위 준킬러 킬러 문항 제외한 15문제 정도를 10분 내로 다 풀고 나머지 20분에 5문제를 할애해야 한다. 그 5문제는 과학 문제라기보다 멘사 두뇌 퍼즐에 가깝다. 산수를 빨리 정확히 잘하는 동시에 실수 없이, 한 번 실수하면 나락 가는 건 순식간...


공부하는 동안 그 어려운 문제들 중 한 문제에 20분을 허비해도 잘 풀어지지 않는 때가 많았다. 난 사실 바보였던 걸까…


사회탐구가 과학탐구보다 공부량이 적어 덜 어렵다고는 해도 타임어택은 피할 수 없다. 현직 선생님들조차 그 시간 안에는 도저히 다 풀기 힘들다고 양심고백 하시는 걸 들은 적도 있다.


그런 걸 미처 겪어 보지도,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충분히 정보 수집을 하지도 못한 나는 오늘날의 고등학생들과 엔수생들이 어떻게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냥 오래전에 하던 대로 우직하게, 일단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내 마음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1. 고교 교과서를 구해서 고등수학 상, 하-수 1-수 2-미적분 순으로 푼다. 교과서 개념 내용을 읽고 혼자 머리 뽀개가면서 이해해 보려고 애쓴다. 기본 문제들은 풀리지만 단원마무리 문제 같은 건 잘 풀리지 않는다.


2.ebs무료 강의가 이렇게 많다니! 교재도 정말 싸구만!!! 수능 연계 교재라 하니까 ebs수능 특강 수 1, 수 2를 풀고 마음에 드는 강사의 강의를 골라 듣는다. 역시나 어렵다. 완강을 하지만 수학 실력은 늘지 않는다.


3. 선택과목 미적분은 머리 털나고 처음 하는 건데, 일단 ebs 수능개념 강의에서 현직 선생님 강의를 듣는다. 기초 강의라 하지만 내신 시험을 거치지 않고 처음 듣기에는 많이 힘든 걸 꾸역꾸역 완강한다.


4. 국어, 영어, 생명과학, 지구과학도 ebs 수능개념, 수능특강 강의를 완강한다.


5.6월 모의고사를 본다. 멘붕에다 패닉 상태에 빠진다. 허겁지겁 메*스터디의 모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패스를 끊고 수학 강사 중 가장 유명하다는 현**의 대표 강의를 듣는다. 일단 완강을 하긴 하는데 죽을 것 같다. 하나도 모르겠다. 기출을 잘 풀어준다는 김**의 기출 강의를 수능 전까지 듣고 가기로 한다. 9월 모의고사도 망한다.


6.10월에 ebs수능완성으로 혼자 실모를 돌려보고 멘붕에 빠진다. 시간 내 다 푸는 과목이 없어…. 밤마다 운다. 울다가 독서실에도 못 간다. 올해는 정말 망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며 그나마 하위권에게 도움 된다는 이런저런 강의를 찍먹 하다가 좌절하고 또 운다.

독서실에 가서도 울다가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나온다. 나오면서 내년에는 수능 안 볼 거야…. 하면서 또 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남... 다음 해에는 정말 수능을 못 보게 된다.)

시험 이삼일 앞두고 하루에 이만 걸음씩 걸어 다니고, 한참 그렇게 걸어가서 수험표 받고, 시험 볼 학교도 걸어 다녀오고, 돌아오는 길에 문제집 팔 택배박스도 주워온다.


7. 수능 당일은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수험생과 수능감독관을 관찰하며 적당히 시험을 치고 나왔다. 중간에 직장동료 한 분 내 시험실에 감독 들어와 주시는 우연은 덤이고요... 반갑게 손 한 번 흔들어드림…



휴대폰을 참던가 없애고, 진득하니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라떼 시절의 수능 생각하며 학교 공부와 ebs로 고3 때 적당히 열심히 해서 괜찮은 입시 결과 나올 거라 생각하면 멍청하거나 나쁜 사람이다.


당신의 자녀는 오늘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에게 얻어터지고 다시 잘해보려고 애쓰고 있거나, 습관화된 무력감에 적당히 풀 수 있는 것만 어떻게든 풀고 최저라도 맞춰 수시로 대학가자…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수능 등급 최저 합의 꿈은 엔수생들의 공세로 무너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십 년 이십 년 전에 자신도 수능 세대라고, 수능 그까짓 거, 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때도 시험을 썩 잘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 보라면 대부분 그때의 절반도 성취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혼자서 교과서 위주로 이비에스 교재와 강의만 듣고 수능 준비하면 망해요. 그렇게 일 년 열심히 해도 메디컬 근처는커녕 인서울 대학도, 수도권 대학도 어려워요.


그렇게 이십 년 만에 두 번째 수능을 망치고 나는 화병과 우울증을 얻었다.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속 수많은 위로를 읽고도, 읽을 때마다 화가 더욱 뻗쳤다. 위로하려 들지 마! 다 지나고 다 늙어서 안락한 자리에 앉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마!


중년여성들이 많이 드나드는 커뮤니티의 게시물과 댓글에서 병든 아이들을 끝도 없이 읊어대던 일이 생각났다. 아이가 수학은 1등급이 나올 정도로 선행 열심히 시켜 실력을 만들어 놨는데, 다른 과목 성적이 잘 나오지 않자 모의고사도, 재수학원도, 다 거부하고 칩거하기 시작했다고... 일단 수능이라도 치게 하고 싶은데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정신의학과에 다니고 있다고… 댓글에는 거의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저희 집도 그래요... 저희 얘기네요…. 공감하는 부모들이 계속 등장했다.


공부하다 미치는 건 나이 든 수험생만은 아니었다. 부모 또는 자신의 높은 기대에 못 미치는 목표를 향해 가다 수차례의 수능을 치르고 마음이 망가져가는 청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이들과는 또 다른 곳에서 자신 만의 전쟁을 벌이던 한 중년은 - 수능 공부를 하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다.


+20년 만에 본 망한 수능 성적표, 20년 전의 성적표. 망해 봐야 맛을 안다. 그걸 굳이 20년 후에 맛보고 있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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