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수능 07.

마지막 응시.

by 반반

처음 공부 시작할 때 삼 년의 휴직을 최대치로 잡았고, 한 해는 시험 준비, 또 한 해는 투병과 건강회복으로 보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수능이었다.


나 때는-하는 옛날식 사고와 반추는 접기로 했다. 요즘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나와 그나마 잘 맞는 강사 한 명을 선택하고, 그 강사의 기초 강의부터 심화 강의까지 커리큘럼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이들은 이런 걸 000(강사명) 풀커리 라고 했다. 수학과 생명과학, 지구과학은 그렇게 강사를 정해 시즌마다 진도를 맞춰 가려고 애썼다. 국어는 문법 부분만 개념 강좌를 듣고, 기출문제와 주간지(실제로 주마다 나오는 것은 아니고, 매일 일정 분량 문학과 독서 과목을 묶어 꾸준히 공부하게 하는 학습지 같은 것)를 매일 풀었다. 수학은 한 강사 커리큘럼만으로는 문제 풀이가 부족하다 싶어, 그때그때 수준에 맞는 다른 강사들의 강의는 (시간이 부족해) 듣지 않고 문제집 위주로 구해다 풀었다.


3월 모의고사를 쳤고, 두 번째 해와 마찬가지로 크게 실망했다. 다만 이번에는 산을 쏘다니다가 또 발목인대를 부숴먹으면 안 되니까, 어찌 마음을 다스릴까 하다가 오래된 가죽가방을 염색했다. 밝은 색이라 매고 다니기 부담스러웠던 가방을 검은색 염색 키트를 사서 굵은 화장붓으로 이리저리 칠했더니, 그나마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이번 수험생활에서 얻은 게 있다면, 그렇게 자기파괴적이지 않고, 어쩌면 생산적일 수도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잠재우는 방법을 찾는 능력을 갖춘 것 정도겠다.


좌절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저 수학 문제들을 풀고, 또 풀고, 다시 풀고. 과학 강의를 듣고, 다시 듣고, 문제를 풀고 또 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6월 모의고사는 여전히 수학 실력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다른 과목 점수가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어렵다는 지구과학을 실력인지 요행인지 몰라도 만점을 받고, 역시 어렵다던 국어 성적도 크게 나쁘지 않게 나왔다. 다만 가장 중요한 수학도 심각한 점수지만, 생명과학은 더 큰일이다, 싶어 주말에는 과학을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과학탐구영역은 소위 개념 문제라는 쉬운 문제들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풀고, 확보한 나머지 시간으로 킬러, 준킬러라 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쉬운 문제들을 푸는 시간도 단축이 잘 안 되었고, 어려운 문제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도 좀체 푸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국어는 아침마다 겨우겨우 주간지 푸는 것으로 감을 유지했고, 영어는 밤마다 자기 전 어려운 기출을 풀고 강사 풀이를 격일로 듣는 정도로 최소한의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 시리얼바와 단백질음료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십분 이십 분 남짓 스터디카페 주변을 산책했다. 무더운 날에도 나무가 무성한 공원에서 나무 위에 앉은 새들을 구경하는 게 그나마 유일한 낙이었다. 걷는 게 정말 좋았다. 문득 이렇게 짧은 산책길에도 행복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시험을 준비하는 이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내 갇혀 공부하는 나날 중에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행복이었다. 점심과 저녁으로 먹는 시리얼바는 물리지도 않고, 매 끼니가 기다려졌다. 그렇게만 먹어도 별로 배고프지 않았다. 주말에는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실내 자전거로 운동했다. 시험 점수 올리기는 힘들었지만, 그렇게 살을 빼는 건 오히려 쉬웠다. 50킬로그램이 넘던 몸무게는 어느새 40킬로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스터디카페에서 수험생활을 하는 건지, 단식원에 갇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건지 가끔 헷갈릴 정도였다.


9월 모의고사는 수능 전 마지막으로 치르는 평가원 주관 시험이었다. 수학은 아주 쉬운 난이도로 나와서, 여태까지 받은 모든 모의고사 점수 중 가장 높은 원점수를 받았지만, 등급은 제자리였다. 그래도, 조금만 더 올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남은 두 달 남짓을 보냈다.

그 두 달 동안, 분명 뭔가를 하고 있지만, 문제를 풀고 강의를 듣고 있지만, 모의고사의 새로운 문제들을 도무지 풀어낼 수 없었다. 킬러 배제 정책을 실시한다고, 준킬러 수준의 난이도가 최고치라고는 하지만, 준킬러는커녕 그보다 더 쉬운 난이도의 문제에서도 매번 막혔다. 수학이든 뭐든 공부에서 도약의 순간이 있다고 하는데, 수험 생활 내내 나에게는 그 순간이 오지 않았다. 20여 년 전 학생 시절일 때는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기 때문에, 평생 노력을 통해 실력이 향상되는 경험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대입도, 임용고사도, 대학원 입학시험도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하곤 했다. 당연히 좌절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렇게 온실 안 화초처럼 공부 못하는 고통을 겪지 못해 본 내가, 굳이 다시 시험을 보겠다고 자초해서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을 겪었다. 지나 보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언제든 한 번쯤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을 겪을 것이고, 망하기도 할 것인데, 그게 다시 보는 수능시험이라는 건, 흘려보낸 시간과, 조금 망가졌다 회복한 건강과, 마음의 고통을 제외하면 크게 손실이 될 것도 없었다. 평생 구경도 못한 낮은 등급을 받아보지 않았으면 내내 저 잘난 줄만 알고 오만하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다시 보는 수능은 내게 겸손을 가르쳐 주었다. 배우는 과정은 아팠지만, 많이 울었지만, 시작한 이상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시간이었다.


수능을 코 앞에 두고,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조금 이르게 깨달았다. 이번에도 며칠 울긴 했지만, 이 년 전의 첫 수능에 비하면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를 하고, 실모(실전 모의고사)를 보며 좌절하고, 그러다가 수능 직전일에 수험표를 받고(수험표 배부 장소에서 교사로 일하는 대학 동기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시험장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험장 학교는 그동안 내가 다니거나 근무했던 어떤 곳보다도 쾌적하고, 편안했다. 이 년 전 학교는 의자와 책상이 내 체격과 맞지 않아 허리가 너무 아팠고, 시험 보고 온 이후 내내 앓았는데, 이번에는 책상과 의자가 맞춤한 듯 편했다. 다른 수험생들이 찾지 못해 사용자가 거의 없는 조용하고 쾌적한 화장실을 찾아내서, 내 은신처로 삼았다. 쉬는 시간마다 혼자 그 안을 거닐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비가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게 뭐라고 평온하고 좋았다. 교실 안 빼곡한 수험생들 사이에 갇혀있다가 그렇게 혼자만 있는 시간이 선물 같았다.

수능 시험은 9월 모의고사에 비하면 매우 어려웠고, 시험을 보는 중에도, 본 후에도 그보다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 나올 것을 예감했다. 가채점용 답안을 수험표에 적어오지 않았고, 시험을 마친 후 채점을 해보지도 않았다.


남은 휴직 세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미친놈처럼 여기저기를 걸어서 쏘다녔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는 12월 초 어느 날에는 걸어서 효사정공원에 갔다. 처음 시험을 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목표로 삼았던(그러나 내가 닿기에는 까마득하고 아득해진) 중앙대학교와 가까운, 한강을 볼 수 있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공원에서, 추위 탓인지 찾은 이는 나 밖에 없는 그곳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로 수능성적표를 조회했다.


몸이 아팠던 둘째 해의 후반부터 1년 이상 더 공부를 했지만, 내 성적은 일 년 공부한 뒤 치렀던 수능 점수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허탈하기도 하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 있는 학교 중 몇 군데를 쓰기도 힘든 점수, 약대에는 원서를 내밀어봤자 접수비만 아까울 점수를 보면서, 나는 뒤늦게 가졌던 새로운 꿈 하나를 접었다. 가고 싶던 학교들에는 나보다 더 노력하고, 더 우수한 젊은 아이들이 입학해서 무언가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그 자리에 만족 못하고 다음 해에, 아니면 또 다음 해에 꼭 의대를 가겠다고 몇 차례 다시 수능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30대 끄트머리에서, 아마도 인생 마지막 수능 시험을 치르고, 이듬해 봄, 복직을 했다. 직전 해까지 수험생이던 나는 아마도 다음 해 시험에서 수능 감독관이 될 것이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중년의 수능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