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남편과 엄청난 언덕을 올랐다. 도착한 곳은 리조트 건물. 소설 <하이라이즈>*처럼 한 빌딩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다. 바닥층에는 구조가 특이한 창문이 있었다. ㄱ자로 꺾인 창문이었는데, 방충망과 섀시가 이어 붙인 흔적 없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창을 여니 푸른색 실크 같은 바다가 보였다. 물결이 점점 거세게 일더니 창문 너머로 포말이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파도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아, 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중창을 닫고, 꼭대기로 향했다. 주홍색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마 일몰인 듯했다. 창밖을 바라보다 누군가 오는 소리에 불안해하다 잠에서 깼다. 꿈이 생생해 구글에 검색했다.
운이 들어오려고 하나, 일과 가사에 치여 여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단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일이 많다. 자정쯤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내 업은 카피라이터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일도 한다. 예를 들면, 캠페인 전략 수립이나 글로벌 광고주 응대와 같은 일들이다. 최근에는 한 국내 가방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캠페인 전략 수립 및 아이디어를 만드는 중이다. 인턴들이 조사한 자료와 내가 찾은 자료, 그리고 캠페인 전략과 아이디어를 모으기만 했는데도 130여 페이지가 나왔다.
소비자 조사부터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브랜드에 필요한 자료인지,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자료인지 판단한다.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다시 찾아 채워 넣는다. 시간은 벌써 자정. 미처 시작하지 못한 다른 프로젝트도 있는데. 숨이 무겁게 흘러나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한다. 다른 프로젝트를 조금 하다 모니터를 끈다. 체력이 버텨주질 못해 뒷부분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한다. 이렇게 한 주, 두 주를 보내고 나면 말라비틀어진 시금치 같은 상태가 된다.
그 와중에 요새 개발자 초봉이 1억이 넘는다더라, 누구는 네이버로 이직했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혼란했다. 금요일 밤,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전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S를 만났다. 날씨도 내 마음을 대변하는지, 거센 비바람이 불었다. 비바람을 뚫고 도착하니, S가 먼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S는 피트니스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브랜드 디자이너로, 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그녀도 디자인뿐만 아니라 마케팅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상황이 비슷한 덕분에 대화가 길게 오고 갔다. 친구와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일이 좋다. 이렇게까지 하다 보면, 나중에 무언가 얻는 게 있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집으로 돌아갈 땐 빗길을 걸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먼지 묻은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돌아와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남편과 시간을 보냈다. 요즘 빠져있는 ‘매드몬스터’ 뮤비와 매드 TV 영상을 보고,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라던지. 시답잖은 일을 말하며 깔깔 웃는다. 폭풍우도 이렇게 소소한 일상 덕분에 넘길 수 있는 거겠지. 별거 아닌 시간이 별것이라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나갔다 오니 머리가 맑아진다. 덱을 어떻게 보완하면 더 좋을지 고민한다. 이 단어를 쓰는 게 맞는지. 이 시기에 이런 캠페인을 하는 게 맞는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으로 다시 덱을 유영한다.
몇 주 뒤,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했다. 매번 CD 님들 서포트하러 간 게 다인데, 이번엔 나보고 발표를 하라고 하신다. 천천히 또박또박 읽자. 남들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되뇌고 또 되뇌었건만, 이번에도 역시 말이 빨랐고 세부 정보 설명이 부족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도매를 쥐고 한 프로젝트인데, 허탈했다. 허탈감 때문인지 발표 후 에너지가 고갈됐다. 학부 때나, 내부 리뷰 때와는 다르다. 과장하자면, 내 말 한마디에 클라이언트가 돈을 쓸지 안 쓸지 결정하는 것이니 신경이 곤두서는 게 당연하다.
스러질 것 같은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수고하셨어요.”라는 동료들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한지도 3주가 지났다. 그들에게선 아직 답이 없다. 꿈과는 달리 해는 잔뜩 흐린 하늘 속에 숨어있다. 해맞이를 간 사람처럼, 답이 오길 기다린다.
*소설 <하이라이즈>는 제임스 G. 발라드의 작품으로, 고급 고층 빌딩의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 간의 계급 차별과 입주민들이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사건이 일어나고, 건물은 결국 지옥으로 돌변한다. 영화에서는 톰 히들스턴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