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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31. 2021

백합과 빛이 있는 힘껏 부딪혀 무지개를 만들었다.

더 오베르 박물관 수강생

우리 회사엔 카피라이터가  하나라, 외로움하강 나선을 깊이 탈 때가 있다. 요 근래  가지 일이 . 주니어 아트디렉터가 몸이  좋다며 병가를 냈다. 전날 야근하다가 울었다는데, 압박감 때문인  같다. 를 응원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래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애매하게 걸쳐져 있던 프로젝트인데, 광고주 단체 카톡방에 초대된 것이다. 다른 건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데, 이것까지. 주어진 일이니 잘하려고 했지만, 오늘 내가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유를 듣고 부모 없이 혼자 학예회를 마친 아이처럼 서글퍼졌다.


처음으로 들어간 회의에서 광고주는 본인의 꿈을 펼치느라 바빴다. 이 프로젝트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저마다의 의견을,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만 콕콕 찍어서 냈다. 마치 중요하지 않은 부분까지 형광펜 치며 공부하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소비자들이 보는 콘텐츠라면 이해하겠지만, 사내 교육용 콘텐츠 제작을 위한 PPM(사전 준비 미팅) 단계인데, 갑자기 아이데이션을 새로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회의는 5시간 이상 진행됐다. 5시간이면 홍콩에 도착해 완탕면 한 그릇을 때리고도 남을 시간이며, 서울에서 대전까지 왕복으로 다녀와도 10분 정도가 남는다. 5시간이면 영문 카피 한 벌을 고쳐 쓰고, 오늘 전달해야 할 자료를 보낸 뒤 피드백을 받고 정리할 수 있으며, 매니페스토 작성을 위한 자료 조사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다니.  그래도 무능한 AE 까지 해내느라 야근하는데.  번이고 체크해도 실수하는  때문에 마음이 힘든데. 새로 투입된 프로젝트는 마치 재수종합반을 수강하는 듯 오랜 시간을 써야 하다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어떻게든  해내니까 일을 맡기는 건가 싶기도 하다.


 혼자서 국문 카피를 쓰고 영문 카피도 쓰고, 와이어프레임도 짜고, PM일도 해야 한다.  일이 너무 많은데, 옆자리 분은 세상 편하게 산다. -이것이 번뇌에 빠진 가장 핵심적인 이유다- 하루 종일 오지도 않을 업무 메일 창을 띄워놓고, 인터넷 기사를 보고 카톡 하고 책을 읽다가 -심지어 책 제목은 <모기>다. 웃기다. 사실, 웃기지 않다- 두어 시간 사라졌다가 돌아와 낮잠을 잔다.  사람보다  연봉이 적다니. 동기부여가 안 되다가도 어차피 어딜 가나 도태될 사람인데, 화를 내서 무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두 개의 자아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중이다.


번뇌가 깊어지니 자연히 명상하는 시간이 늘었다. 하루 세 번 양치질하는 것처럼 꼬박꼬박 한다. 챙길게 많아서 생기는 압박감과 이렇게 일하는데 월급은 적다는 좌절감,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나 하는 괴로움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래 봤자 나는 월급 노동자고, 내 브랜드를 키우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어차피 일해야 한다면 긍정적인 마음이 나에게도 좋다. 명상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럴 땐 꽃을 잡는다. 과제도 해야 하니, 겸사겸사다. 이번 과제는 ‘체어백 디자인’이다. 중급반을 수강하며 처음으로 큰 작품을 디자인해봤다. 매번 디테일을 살리다가 큰 작품에 도전하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테이블 위에 의자를 올리고 치킨 와이어를 감았다. 꼼꼼하게 했어야 했는데, 사실 이땐 무슨 방식으로든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 대충 묶었다.


의자 위엔 수강생 분이 선물해준 그림을 놓았다. 의자의 정 가운데에 내 마음이 있고, 위아래를 자연이 감싸주는 느낌을 내고 싶었다. 나만의 에덴동산을 만드는 느낌이랄까. 늘 느끼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저마다의 하늘을 품고 산다. 로맨틱한 석양이 비추는 하늘 일수도, 혹은 폭풍우 치는 하늘이, 또는 잔잔한 하늘일 수도 있다. 치킨 와이어에 소재를 과감하게 넣었다. 위아래가 이어지는, 그래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형태를 만들고 싶었다. 마음에서 들끓는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 치킨 와이어를 느슨하게 묶은 탓에 아래쪽 다리의 소재가 앞으로 쏠렸다. 똑바로 세우려는 마음을 버리고 손 가는 대로 작업했다. 마무리를 하고선 친구가 선물한 조명을 비췄다. 조명은 원래 주황색 계열인데, 백합과 빛이 있는 힘껏 부딪혀 새로운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있었다. 어레인지에 몰입했던지라 시간이 이렇게나 지난 줄 몰랐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후련하다.


주변 상황이 어떠하든 나는 내 길만 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무지개를 만들어낸 백합이 될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일에 접근해 나가는가 그리고  일에서 어떤 가치를 얻는가 하는 점이다.” 이 말을 잊지 말고, 나를 믿고 부딪히면서 걷자. 주변의 네온사인이나 멋진 건물에 현혹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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