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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Aug 18. 2019

밥부터 잘 챙겨 먹어요.

경력 2년 남짓, 다닌 회사는 4곳. 전직 카피라이터의 커리어 방랑기 4

 어릴 땐 입이 짧았다. 죽의 생김새 때문에 아플 때도 죽은 절대 안 먹을 정도였다. 입 짧은 딸을 둔 탓에 엄마는 늘 밥상 위에 두부전을 내놓아야 했다. 성인이 된 뒤엔 마음이 아플 때도 이 음식들을 찾는다. 엄마한테 조리법을 배워 그대로 해봤는데, 내가 하면 이상하게 그 맛이 안 난다. 음식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위로를 먹었던 것 같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끼니를 거른다. 배고프면 과자나 인스턴트로 위를 채웠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 못 드는 새벽, 주방에서 종종 고소한 냄새가 나곤 했다. 엄마는 그 늦은 새벽에, 방구석 하나 차지한 큰딸을 위해 요리를 했다. 딸은 살찐다고 뾰족하게 말하고,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면 그제야 한 입 먹는다. 눅눅한 새벽, 부엌에서 내 방까지 오는 짧은 시간에 혹시라도 전이 식을까 접시까지 데운 마음을 조금씩  잘라먹는다. 홍고추씨가 실수로 들어갔는지 코끝이 알싸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금도 이력서를 넣는다. 면접도 몇 차례 보고, 개중에는 최종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계약이 엎어지기도 했다. 일하고 있지만 이룬 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들 때. 정신이 허기진다. 20대 후반엔 꼭 큰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3개월간 한식을 배웠다. 내 옆자리 분은 선생님의 시범만 보고 애호박, 양파, 감자 등 요리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똑같은 크기로 썰어 예쁘게 접시에 담으셨다. 내 도마 위엔 크기가 제각각인 감자와 양파, 애호박이 나뒹굴었다. 간도 제대로 못 맞추고, 종종 요리를 태워 먹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서 배운 걸 연습했다. 제각각이었던 재료의 크기도 비슷해졌고, 극단적이었던 간도 알맞게 맞출 수 있었다.


 당연한 이치를 일할 땐 잊는다. 원하는 곳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버티는 게 어려웠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내가 이 정도로 못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낸 아이디어는 너무 모호하고, 타깃을 고려하지 않았을뿐더러 실현 가능성도 없었다. 대리님들의 아이디어를 보고 왜 난 저렇게 못 하지, 라는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든 빨리 저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싶었다. 자책의 밤, 엄마가 방문을 두드렸다. 따끈한 두부전이 들려있었다. 웬일로 엄마가 바로 나가지 않고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으로 접시만 보고 있었다.


 “두부전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줄까? 두부를 면보에 넣고 꼭 짜. 당근이랑 양파를 다지고 계란이랑 소금 넣은 뒤에 잘 섞어줘. 그다음에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조금 두르고 약불로 구우면 돼. 쉬울 것 같지? 근데 아니더라. 불 조절하는 데 오래 걸렸어. 조금만 세게 하면 타고 또 너무 약하면 안 익고. 조금 빨리 뒤집으면 축축하고, 조금 늦게 뒤집으면 타고. 뭐든지 시간이랑 연습이 필요하더라.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해.”


 엄마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은 왜 못하지.라는 생각에 허우적거렸다. 지금은 생각하는 대신 행동한다. 과정을 지나온 나 자신에게 칭찬한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요리 동영상을 보고 한 번에 그 음식을 만들기도, 어떤 사람은 여러 번의 시도가 필요하다. 밥을 잘 지으려면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어느 정도의 시간과 많은 연습량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플레이팅이 완벽하지 않아도, 생각했던 것과 맛이 달라도 마음을 다해 만든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난다. 3분짜리와는 다르다. 20대에 성공한 친구는 거의 없다. 다들 비슷하다. 3분 요리가 아니라 더 깊이 있는 맛을 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이상향은 박완서 선생님이나 황현산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글이 맛있고, 울림이 있어 안 찾아보고는 못 배길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시간이 쌓여야 원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음을, 오랜만에 엄마의 두부전을 먹으며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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