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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by 나탈리

주황색 스타우브 무쇠솥에 쌀을 넣고, 씻고, 불린다. 강한 불에 5분, 주걱으로 젓고 약불에 15분, 그리고 10분 뜸을 들인다. 남편은 쿠쿠가 있는데 뭐 하러 거기다 하냐며 툴툴거리곤 한다. 나는 누룽지가 먹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사실은 나의 외할머니, 이원숙 여사가 생각난 건데 말이다.


외할머니 집은 놀이동산 같았다.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해 딩-동- 초인종을 누르면, 마법의 문이 열렸다. 두툼한 갈색 스웨터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영이 왔냐” 하시면, 나는 헐레벌떡 신발을 벗으며 “할아버지! 할머니! 나왔어!”라고 외치며 주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할머니는 늘 뒷모습으로 인사했다. 장조림, 멸치볶음, 김, 다진 고기가 들어간 계란말이는 기본. 수제 돈까스나 불고기, 새우튀김 등 우리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고 계셨던 탓이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에메랄드 시티처럼 영롱한 에메랄드 색 장판 위에 앉아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회색빛의 빠글한 파마머리. 언제고 소매 춤에서 요술봉을 꺼낼 것 같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 적도 있었다.


할머니가 주방 축객령을 내리면, 나는 안방의 한쪽 벽면을 채운 자개 옷장을 보러 가곤 했다. 옷장은 세 개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운데 있는 옷장이 제일 좋았다. 그 옷장은 양문형이었는데, 각 문에 자개로 만든 봉황 조각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도 자개로 만들어져 촉감이 좋았다. 문을 여닫으며 두 마리의 봉황이 <견우와 직녀>가 된 양 만났다 헤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다. ‘밥 먹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 안방 밖으로 잽싸게 나왔다.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 외할머니 옆자리를 뺏기기 때문이다.


수저는 다섯 쌍이지만, 흰 쌀밥은 네 개만 놓여있었다. 할머니가 먹는 밥은 노르스름했다. 번쩍이는 은색의 휘슬러 냄비 바닥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밥을 할머니는 열심히 펐다. 고기도 노릇하게 익은 게 맛있으니까, 눌어서 캐러멜색을 띄는 그 밥이 참 맛있어 보였다.


“할머니 밥 나랑 바꾸자!”


“나영이 너는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어린 마음에 맛있으니까 할머니 혼자 독차지하려는 줄 알았다. 내가 울먹이자, 할머니는 누룽지 한 숟갈을 주셨다. 꼬들꼬들한 게 흰 밥보다 맛있었다. 매일 이 밥만 먹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난처해하셨다. 백미보다 꼬독한 누룽지가 좋다고, 이거 없으면 밥을 안 먹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자신의 밥과 내 밥을 반반 섞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밥을 먹고 나면,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으러 나가셨다. 그러면 할머니랑 티브이 앞에 앉아 <패트와 매트>, <톰과 제리>, <월레스와 그로밋>, <보거스는 내 친구>, <바바파파> 같은 애니메이션을 봤다. 전자렌지에서 토도독 팝콘이 튀켜지는 소리가 잦아질 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할머니와 나는 경쟁적으로 팝콘 그릇을 비웠다. 패트가 톱질을 하다가 테이블도 같이 썰어버릴 땐 와하하 웃었고, 보거스가 악당의 눈을 피해 달아날 때는 팝콘 먹는 것도 잊은 채 숨죽였다. 월레스와 그로밋이 달 치즈를 먹는 것을 보며 나도 저걸 먹고 싶다고 하면, 할머니는 참 크래커에 노란 치즈를 얹은 간식을 주시곤 했다. 그리고 먹다 남은 누룽지를 둘이서 해치우곤 했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떡볶이나 피자 같은 배달 음식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음식이 달라져도 누룽지는 꿋꿋하게 밥상을 지켰다. 일주일에 한 번 가던 할머니 집을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가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고3을 지나, 대학생, 그리고 사회인이 되었다. 결혼 후, 오랜만에 외할머니 집에 갔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신발장에는 구두주걱 대신 보행보조기가 세워져 있었고, 전자렌지 앞에는 즉석 팝콘 봉지 대신 약봉지가 쌓여 있었다. 주방을 요정 대모처럼 휘젓던 할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얌전히 앉아 계셨다. 작은 삼촌과 엄마가 식사를 차렸다. 여느 때처럼 내 밥그릇에 흰 쌀밥 조금, 누룽지는 많이 담았다.


“아가씨, 아가씨는 그런 거 먹으면 못 써!”


할머니가 내 밥그릇을 자기 앞으로 가져가며 호통쳤다.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할머니의 시간은 서서히 거꾸로 흘렀다. 하나뿐인 딸인 엄마조차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 나 누룽지 좋아해. 그러자 할머니는 아가씨는 예쁜 것만 먹어야지, 이런 건 내가 먹는 거라고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요즘 누룽지가 건강에 최고라는데~ 아, 나도 건강하고 싶은데- 누룽지 한 입만 먹고 싶은데.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할머니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맞아 엄마, 나 요새 누룽지 많이 먹잖아. 하며 말했다. 작은삼촌마저 거들자, 할머니가 밥그릇을 내게 다시 슥- 밀어주었다. 젊은 아가씨가 건강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냄비에 눌어붙은 밥처럼, 할머니의 기억이 오래 눌러 붙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박 긁어내도 나만큼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자주 갈 걸. 엄마를 귀찮게 해서라도 따라갈걸. 전화라도 자주 할 걸. 할머니 귀가 안 좋다고 했을 때, 그렇구나. 하지 말고 영상 통화라도 더 자주 할 걸. 수신인 없는 후회가 가득 차오르는 날이면 냄비 밥을 한다.


냄비가 달라서 그런가, 오늘도 그 맛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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