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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선망했던 롯데리아

by 나탈리

유년기를 영동에서 보냈다. 강원도 영동 말고, 곶감과 포도와 국악의 고장 충청북도 영동이다. 영동은 시골과 구도심을 섞어놓은 곳이었다. 학원도 있고, 마트와 오락실과 노래방도 있다. 없는 거라곤 영화관이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정도였다. 심심하다면 심심했던 영동의 외식 씬에 긴장감을 주는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롯데리아다.


동그란 문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면, 흑백의 타일이 깔린 바닥과 빨간색 에나멜 재질의 소파와 스툴이 있었다. 마치 하이틴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직원들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는 흰색의 셰프 모자 같은 것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롯데리아는 등장과 동시에 영동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학부모회 모임부터 생일 파티까지 동네 사람들의 대소사를 함께했다.


우리 가족도 롯데리아에 자주 들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난 치킨버거와 치즈 맛 양념 감자에, 엄마와 동생은 불고기버거와 치즈 맛 양념 감자에 정착했다. 치즈맛 양념 감자를 어떻게 해서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경험했을 때의 센세이셔널함은 아직도 선명하다. 감자튀김을 섞어 먹다니! 마치 불을 발견한 인류 같았다. 과정도 재미있었다. 라면을 부셔먹을 때처럼 스프를 탈탈 턴 뒤에 봉지에 뿌리고, 봉지를 마구 흔드는 행위가 즐거웠던 것 같다. 스프의 양이나 섞는 방식을 주도적으로 정할 수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았다. 맛도 좋았다. 짭조름하고 쿰쿰한 치즈 향이 났으니까. 양념 감자에 너무 빠져서 그것만 먹으러 간 적도 많았다.


혼자 양념 감자를 사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일진 언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한 눈을 깔고 주문한 양념 감자를 받아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언니들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문 근처에 앉아있던 터라 제발 그냥 가라고 기도했다. 역시.. 슬픈 예감은 늘 적중했다. 언니들이 내 주변에 앉았다. 한 언니가 엄마가 새로 사준 머리띠를 만지작거렸다.


“야, 너 머리띠 예쁘다?”


“네에..”


“언니가 딱 한 번만 써보면 안될까?”


“안되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난감하던 차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얘들아, 그만해. 얘 나랑 친한 동생이야.”


영어 대회를 같이 준비했던 지민 언니였다. 이 언니는 예쁘고 공부를 잘해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일진 언니들도 지민 언니 말을 잘 들었다. 지민 언니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그 언니는 내게 우상 같은 존재라 쉽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언니가 나를 자신의 친한 동생이라고 말하다니! 삥 뜯기는 걸 막아주는 것보다 언니가 ‘친한 동생’이라고 한 게 너무 좋았다. 일진 언니들이 자리를 뜨자 지민 언니가 대신 사과를 했다. 나쁜 애들은 아니라면서,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고 말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며칠 뒤, 롯데리아에 치즈 스틱을 먹으러 갔는데 지민 언니 혼자 있었다.


“언니, 양념 감자 드실래요?”


언니와 나는 마주 앉아 치즈 맛 양념 감자를 먹었다. 영어 대회로 시작한 이야기는 친구 관계와 미래 계획으로 넓어졌다. 지민 언니는 꼭 서울에 갈 거라고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서, 멋진 남자를 만날 거라고 했었다. 그 언니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종종 마주쳤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폭주족 언니 오빠들을 만났을 때도 그 언니가 구해줬다. 영동은 정말 작은 동네다.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을 모든 동네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어른들은 애들이 들을까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소문을 나눴다. 걔가 성적은 좋은데 남자 친구가 참..


분당으로 이사 오면서 치즈 맛 양념 감자도 서서히 먹지 않게 되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처럼, 롯데리아도 점점 자취를 감췄다. 간혹가다 길에서 롯데리아가 보이면 지민 언니가 생각난다. 내게 말했던 것처럼 꼭 서울에 왔는지.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멋진 남자를 만났는지. 나를 구해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구해주었는지 등등.


오랜만에 치즈 맛 양념 감자가 당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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