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금기어

by 나탈리

내뱉으면 꼭 실행해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집에서는 산책이 그렇다.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타다다다 뭉툭한 발톱이 바닥에 부딪혀 키보드 ASMR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하네스와 산책 가방을 보관하는 선반장 앞에서 멈춘다.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궁뎅이를 흔드는 크림색에 가까워진 강아지와 늠름한 척 앉아있지만 앞발을 동동거리는 흰 개가 보인다. 우리 집 막내 토르와 토비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하네스를 입힌다. 심호흡한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단거리 육상 올림픽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선 올림픽 단거리 육상 중계가 시작된다.


제2천 회 나탈리 배 단거리 달리기 중계를 시작합니다! 토르, 토비 선수 출전했습니다. 올해로 두 선수의 나이가 12살, 11살로 적지 않은 나이인데요. 아직도 출발선 앞에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말하는 동안 현관문이 열렸습니다. 토르 선수, 민첩하게 반응합니다. 공동 현관문을 그대로 통과해 아파트 뒷길의 산책로를 달립니다. 앞에 장애물이 있는데요, 두 선수 아주 가볍~게 점프하고 내리막길을 힘차게 달립니다. 토비 선수,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선두를 뺏고 뺏기는 상황. 곧 탄천이 나옵니다. 누가 리드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데요, 토르 선수가 조금 더 빨랐습니다. 오늘은 판교행이군요-


자전거가 오는지 확인하며 숨을 고른 뒤, 다시 뛴다. 공원에서 노는 친구들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 집 스피츠와 토이 푸들에겐 썰매견의 유전자가 있는 건지, 앞만 보고 질주한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눈팔지 않는 정신력. 그건 누굴 닮은 걸까.


두 강아지가 약속이라도 한 듯, 카페 세시 세라(Ceci cela) 앞에서 멈췄다. 카페의 외관은 톤다운된 민트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곳만 유럽을 합성한 것 같은 이질감이 든다.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와 미지근하게 데운 멍푸치노 두 잔을 주문했다. 강아지들이 챱챱 멍푸치노 마시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산책이란 뭘까.


산책은 ‘한가한 기분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것.’이라는데, 내 산책은 올림픽 같다. 출퇴근길, 약속 장소에 가야 할 때 등 경로 이탈이 불가한 걷기를 주로 했던 탓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우리 강아지들도 그런 건가, 자조한다.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으며 생각했다. 산책을 한 건 오히려 낯선 곳에서였다고. 낯선 도시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리저리 거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건물마다 조각상이 세워진 런던의 스트랜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그런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장면이 있었다. 오후 세 시의 햇빛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던 남자. 슈트를 차려입은, 의자에 트렌치코트와 서류 가방을 걸어둔 딱 봐도 직장인 같았던 그 남자였다. 그 남자 옆 테이블의 여자도. 모두 직장인으로 보이는데, 분명히 근무 시간일 텐데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땐 ‘일 안 해도 되나?’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던 것 같다.

*스트랜드(The Strand): 런던을 대표하는 거리로, 코벤트 가든과 웨스트민스터, 뮤지컬 <라이언 킹> 공연장인 리세움 극장 등 관광지가 모여있다.


지금 내 모습을 본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강아지들이 집에 돌아가자며 낑낑댄다. 돌아갈 땐 경로를 이탈해 보기로 했다. 평소 가는 길을 놔두고 더 비잉-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새로운 자극을 만난 강아지들이 열심히 냄새를 맡고, 냄새를 뿌렸다. 한가한 마음이 별것이 아니구나. 가장 효율적인 경로나 알던 길을 놔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구나. 십오 분이면 도착할 길을 삼십 분 걸려 도착했다. 토르와 토비의 발을 닦아주고 가족들과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십 분이면 먹을 밥을 이십오분 걸려 먹었다.


“배부른데 산ㅊ..”

아빠가 뒤늦게 입을 닫았지만 이미 말은 흘렀다. 강아지들이 다시 선반장 앞에 대기했다. 이번엔 아빠 차례다. 아빠는 어떤 산책을 하고 올까? 돌아오면 묻기로 하며 인사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