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은 채식 커리

by 나탈리

나는 감정의 고저가 명확한 편이다. 계절처럼 일정한 주기로 즐거움과 우울함이 다녀간다. 음식 섭취도 그렇다. 2-3년에 한 번씩 음식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3년 만에 그 기간이 다시 찾아왔다. 브런치에는 예전에 써 두었던 음식 이야기를 업로드했지만, 지난 2주 간 잘 먹지 않았다. 하루에 삶은 계란 하나 또는 귀리 우유 한 컵과 삶은 채소 조금. 그동안 섭취한 영양소가 많아서인지 다행히 몸에 이상은 없었다. 운동량을 아주 조금 늘리고, 따뜻한 차를 자주 마셨다.


그렇게 음식 생각이 나지 않더니, 어제 엄마랑 같이 점심을 먹은 뒤부터는 배고파졌다. 아주 신중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고, 집 근처 홈플러스에서 장을 봤다. 주말에 봤던 어느 일본 드라마에 나온 연어 솥밥을 해 먹을까 하다가 커리로 메뉴를 변경했다. 연어 솥밥은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아서다.


집에 돌아와 밥을 안치고 커리에 들어갈 재료를 손질했다. 가장 번거롭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흙 묻은 채소를 흐르는 물에 씻고, 껍질을 벗길 때 나는 풀향기가 좋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만큼 채소를 다듬는다. 왜 '먹을 수 있는 양만큼'이냐면, 재료를 다듬다 보면 모자라지 않을까? 이 정도는 두 명이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재료를 손질하기 때문이다.


채소는 그대로 있을 땐 향이 많이 나지 않는다. 다듬어지는 순간 향을 낸다. 생김새만큼이나 저마다의 향을 갖고 있다. 마늘 4개 중 2개는 편썰고, 나머지 2개는 통으로 넣었다. 가지는 꼭지를 제거한 뒤 반만 잘라 썰어두고, 양배추 1/4통은 채 썰었다. 당근 한 개는 깍둑썰기로, 양파 1/4개는 채 썰고, 우엉 1/2는 그냥 썰었다. 버섯은 구이용으로 나온 제품을 구매해서 그대로 넣었다. 마늘의 아린 향과 가지의 풋풋한 향, 양배추의 상큼한 향과 당근의 달큰한 향, 똑 쏘는 양파의 향과, 풀 같은 우엉의 향까지. 버섯을 잘랐을 때 나는 풋내기 향도 좋아하지만, 이번엔 맡을 수 없어 아쉬웠다.


냄비에 베제카 언필터 올리브 오일을 듬뿍 두르고 인덕션 기준 화력 5로 예열한다. 어느 정도 예열이 됐으면 마늘을 넣고 화력을 7로 올렸다. 3분 정도 지나면 마늘의 매운 냄새가 사라지는데, 그때 채 썬 양파를 넣어준다. 양파가 투명해지면 우엉과 당근을 넣고, 그다음엔 양배추와 가지를, 버섯은 마지막에 넣는다. 조리하기 전엔 풋풋하고 아린 향이 났던 채소들이, 불과 기름을 만나 들큰하고 고소한 향을 낸다. 사회초년생 시절의 천방지축 같던 내 모습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사회인 태가 나는 내 모습 같다. 인덕션 세기를 5로 내리고 소금과 후추, 그리고 약간의 버터를 넣어 뭉근하게 익힌다. 채소가 어느 정도 흐물 해지면 커리를 넣을 차례다.


홈플러스에 강황가루가 있으면 그걸 샀을 텐데, 없어서 청정원 치킨 마크니 소스를 구매했다. -제목이 반쯤은 채식 커리인 이유다- 채소 양이 생각보다 많아져, 이 한 병으로 커리를 만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한 병을 다 넣으니 어느 정도 자작한 커리가 완성됐다. 커리가 완성되기 전,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했다. 치익-하며 김 빠지는 소리가 나고, 조선향미 특유의 맑고 고소한 쌀 내음이 부엌에 퍼진다.


뭔가, 커리만 먹기 뭐 해서 남편을 주려고 산 소고기 안심 두 덩이 중 작은 고기를 구웠다. 커리가 조금 짤 것 같아 고기는 간을 약하게 했다.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예열을 오래 한 다음, 세기를 7로 높여 빠르게 구워준다. 기름이 자글자글 튀는 소리가 멜로디처럼 들린다. 종이 덮개를 살짝 들어 어느 정도 익었는지 확인한다. 소고기가 반쯤 갈색으로 변하면 집게로 뒤집어준다. 살짝 탄내가 날 즈음 불을 끄고 잔열로 스테이크를 익혀준다.


그리하여 완성한 제대로 된 식사.

음~ 맛있다. 채소의 달달하고 고소한 맛과 치킨 마크니의 스파이시한 맛의 조화가 좋다. 여기에 고기도 잘 익혀서 안심 타다끼를 먹는 느낌이 든다. 나를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한 그릇 싹싹 비웠다. 너무 많이 먹었나..? 갑자기 걱정된다. 급하게 빠진 살은 급하게 찌니까. 괜한 마음에 팔 굽혀 펴기도 하고, 요리조리 돌아다니다 설거지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


요새 왓챠 프리미엄 이용권 3개월 분을 선물로 받아 이용 중이다. 왓챠에는 드라마들이 정말 많은데, 내 취향에 맞을 것 같다며 <심야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 <왓코루와 술> 같은 일본 드라마를 추천했다. 에에-?와 아앙?의 장벽에 부딪혀 평생 일본 드라마는 안 볼 거라 생각했는데, 심심풀이 삼아 본 드라마들이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MSG 가득한 리액션이 없어서 좋다. 과자 같은 콘텐츠도 좋지만, 요새는 두부같이 자연의 맛이 나는 콘텐츠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콘텐츠는 대부분 슴슴하다. 아무래도 난 슴슴한 글을 쓰는 사람인 걸까. 한참 브런치에 글을 자주 올리다가 뜸해진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너무 관성적인 글이 아니었는지. 브런치에 어떤 글을 올리고 싶은지. 고민이 한가득이다. 고민한다고 자연히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맛있는 밥을 만들기 위해선 뜸 들이기가 필수이듯, 당분간 뜸 들이는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keyword
나탈리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카피라이터 프로필
팔로워 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