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낯글 Jan 29. 2021

고등학생 때 만난 술친구

말의 힘에 대한 경험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속담이다. 나도 말로 빚진 경험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같이 다니는 사람들은 있지만 친한 사람은 별로 없는, 눈치 보며 겉도는 위치가 내 자리였다. 그런 내게 수학여행이라는 이벤트는 너무 가혹했다. 같이 버스를 탈 사람도 필요했고, 숙소를 같이 써줄 사람도 필요했다. 평상시에도 겉돌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수학여행을 안 가기로 결정했다.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눈치를 볼 바에는 그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집에 온 날, 저녁에 전화가 걸려왔다. 반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통화하는 것 자체에 부담감을 느껴서 평상시 같으면 받지 않았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은 전화를 받았다. 그 친구는 내가 수학여행을 안 간다는 것을 들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다짜고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계속 살 것이냐고 물어봤다. 지금 당장의 이사 계획은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중에 동네에 소주 한잔할 사람 필요하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반장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끝까지 간다고 하지 않느냐, 네가 동네에서 그냥 소주 한잔 하고 싶을 때 부를 수 있는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수학여행을 같이 가는 게 어떻냐면서 이야기를 했다.     


결국,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도 내 속의 이야기를 했다. 왜 수학여행을 안 가려고 했는지, 어떤 점이 힘든지에 대해서 말을 했다. 같은 반의 학생이 나를 챙겨주다는 점, 그 당시 누구와도 잘 지내고 인기 있던 반장이 챙겨준다는 점 등 복합적인 이유로 나도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반장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신이 챙겨줄 테니 함께 가자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하게 된 계기가 담임 선생님의 권유였든, 자신의 책임감 때문이었든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수학여행 내내 나를 잘 챙겨주었고 그 뒤에 학교생활에서도 챙겨주었다.      


그때 미성년자이던 그 친구가 소주 맛을 어떻게 알고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시간이 흘러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나의 소주 한잔하자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사람 간의 관계이니 그 친구와 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싸울 일이 생겨도 나는 항상 그 친구에게 져준다. 내게 별 잘못이 없다고 느껴져도 일단은 한 수 접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기회가 된다면 푼다. 내 고등학교 생활 중 일부분, 내가 지금 동네에서 소주 한잔하고 싶을 때 부를 수 있는 친구들 일부분, 내가 그 친구에게 빚진 부분이다. 그 부분이 내가 그 친구와 평생 가고 싶은 이유가 되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때 친구가 걸어준 전화 한 통은 그 정도의 값어치였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 나쁜 틀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