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부터 많이 들은 말이 있다.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목표를 일찍 정한 사람들은 성공한다. 그런 주변의 외침은 점점 강해지더니 고등학교에 와서는 내 꿈을 정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거에 더해 자신이 꿈을 위해 노력한 증거들을 모아야 했다. 그래야 대학 입학에 유리한 전형도 존재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확고했다. 아니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 내가 그렇게 맹신했던 목표를 지금 이루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때 내가 생각한 내 미래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 직업에서 만족감도 느끼고 보람도 느낀다.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겠는가, 그런 부분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함도 느낀다.
처음 내 평생의 꿈이라 생각하던 일을 위한 학교 학과의 진학에 실패했을 때 나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몇 년간 내가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 목표의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이란 대단했다. 그리고 방황을 했다. 길다면 긴 시간이고, 긴 흐름의 인생에서 보자면 찰나의 시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확실한 점은 당시의 나는 정말 힘들었다는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마저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근시안적인 생각이었다. 원하던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겪은 것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때는 그게 세상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필요 없는 아픔을 느끼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의 교육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장래희망을 강요한다. 물론 내가 그렇게 목표로 하던걸 이루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시작부터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때부터 선순환이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이 못마땅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일 초등학생 때부터 목표로 한 것을 이뤘다면 어렸을 때부터 목표를 가지게 한 것을 찬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가정들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감정, 지금 내게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할 뿐이다. 목표를 빨리 정하는 것이, 시작을 먼저 할 수 있게 하고 목표를 빨리 이룰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꿈에, 학생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사실 나는 아직 내 꿈이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그래도 그들보다 조금은 더 산 나도 이렇게 헤매는데 그들에게도 자유롭게 헤맬 수 있는 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보상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마땅한 노력으로부터 도망친 겁쟁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학과와 진로에서 나는 행복과 재미를 느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다. 내가 초·중·고 학생 때부터 믿었던 것들이 대학교 4년 동안 뒤집어졌다. 만약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직업을 고등학교 시절에 진지하게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 살고 싶은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를 움직이는 것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는 나를 만난 학생들이 교과서 너머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도 지금의 나를 넘어서 그 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 정진하다 보면 나를 설레게 하는 새로운 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들도 이렇게 자유롭게 헤매다 보면 가슴 뛰는 일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지 않을까? 운명적인 만남은 기대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