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이란 말이 신화적인 이야기, 로맨틱한 만남에 주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도 운명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는 우리에게 우울함을 알려주기 위한 운명을 타고났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불을 가져다준 것처럼. 우리에게 우울, 슬픔을 알려주는 인생을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주고 벌을 받았다면, 쳇 베이커의 삶은 이미 삶 자체가 벌과 같았다.
우리가 밝은 것을 알 수 있는 건 어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슬픔은 기쁨이 있을 때 그 존재가 빛을 발한다. 그런 점에서 무대의 화려함이 곁들여져 있는 그의 인생은 우울함을 알려주기 위한 최적의 무대였다.
음악 덕분에 일어났지만, 다시 음악을 위해 타락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고뇌를 반복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 떠올랐다. 밝음과 어두움을 반복하는 그의 삶이 어딘가 내 삶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절의 깊이가 다르고 내용이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공연할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어둡지만, 막이 내린 뒤 관객들에게는 즐거움이 남을까? 내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들로 내 삶을 채워내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운명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운명을 더욱 부정하게 되었다.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내 삶은 그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외침의 연속일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저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나아갈 길은 내가 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