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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똥밭 Jun 04. 2021

능력주의 시대가 만든 비극

조금 깊게 보기 조금 넓게 보기 2.

며칠 전, 네이버의 젊은 직원의 자살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이와 동시에 전해진 어느 여군의 비극적 사건은 현재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ㅠ ㅠ)


우리 청춘들이 '삼성'과 함께 취업 희망 1순위로 꼽는다는 '네이버'에 입사하여 주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그 청춘이 이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개인 사정이 아니라 회사 임원의 갑질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터진 후 언론사를 통해 기획 연제처럼 이어지고 있는 'IT 기업'들의 부조리한 조직 문화에 대한 기사들은, 흡사 우리 기업 문화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신분의 위계가 당연시되었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양반이 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 시대로 말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 -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로 '능력주의의 폭정'라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하고 나는 최근 읽고 있는 마이클 센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이 떠올랐다. 현대의 대부분의 나라가(심지어 공산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중국도 이를 따른다.) 교리로 떠받들고 있는 ‘능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 책을 통해 네이버를 대표로 하는 성공한 IT 기업에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바로 '능력주의'에 도취된 자들의 취기(또는 광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능력주의'가 최고의 가치인 마냥 추앙받는 현대 사회는 부모로부터 부와 지위를 물려받은 소위 ‘금수저’ 출신 CEO와 임원들은 오히려 여론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자수성가로 평가받는 CEO와 임원들은 오직 자신만의 능력만으로 그 지위(부)를 성취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누리는 지위와 권력은 지극히 공정하고 합당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그들의 교만(오만)을 자극하게 되고, 그 교만은 아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무능력자, 햇병아리’로 취급하며 모멸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네이버 임원의 비이성적인 갑질은 사실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사회적 공분과 물의를 위디스크 '양진호' 사건이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지극히 개인의 인격의 문제로 정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가해자인 그 네이버 임원과 그 임원의 문제를 알면서도 비호한 네이버 CEO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 교리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말 그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진짜 서글픈 것은, 그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 지옥을 탈출하지 못했던 이유 또한 그의 발목에 채워진 '능력주의'라는 쇠사슬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루저'로 낙인찍히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리야 하는 이 사막한 시대에 난 내 자식들과 젊은이들에게 어떤 지혜와 어떤 철학을 제시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뿐이다.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성공의 거친 윤리에서 돌아와, 능력주의의 폭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 - 능력주의의 폭정)의 서문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올릴 시점에 보도된 기사에는 피해자분의 구체적인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피해자분의 연령을 이, 삼십 대의 젊은 분이라고 생각했다.(최근 주변에서 이십 대 젊은이의 자살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엊그제 올라 온 기사로 그분이 사십 대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내게는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슬픔 또는 공분이 그 당사자의 나이, 가정 상황 등 주변 환경에 따라 그 무게감이 달라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나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로 삼십 년의 사회생활 동안 희로애락과 굴곡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한 가장이 이 척박한 세상의 안식처이며 버팀목인 가족을 두고 그런 결심했을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좀 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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