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네이버의 젊은 직원의 자살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이와 동시에 전해진 어느 여군의 비극적 사건은 현재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ㅠ ㅠ)
우리 청춘들이 '삼성'과 함께 취업 희망 1순위로 꼽는다는 '네이버'에 입사하여 주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그 청춘이 이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개인 사정이 아니라 회사 임원의 갑질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터진 후 언론사를 통해 기획 연제처럼 이어지고 있는 'IT 기업'들의 부조리한 조직 문화에 대한 기사들은, 흡사 우리 기업 문화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신분의 위계가 당연시되었던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양반이 노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그 시대로 말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 -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로 '능력주의의 폭정'라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하고 나는 최근 읽고 있는 마이클 센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이 떠올랐다. 현대의 대부분의 나라가(심지어 공산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중국도 이를 따른다.) 교리로 떠받들고 있는 ‘능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 책을 통해 네이버를 대표로 하는 성공한 IT 기업에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바로 '능력주의'에 도취된 자들의 취기(또는 광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능력주의'가 최고의 가치인 마냥 추앙받는 현대 사회는 부모로부터 부와 지위를 물려받은 소위 ‘금수저’ 출신 CEO와 임원들은 오히려 여론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자수성가로 평가받는 CEO와 임원들은 오직 자신만의 능력만으로 그 지위(부)를 성취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누리는 지위와 권력은 지극히 공정하고 합당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그들의 교만(오만)을 자극하게 되고, 그 교만은 아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무능력자, 햇병아리’로 취급하며 모멸감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네이버 임원의 비이성적인 갑질은 사실 새삼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사회적 공분과 물의를 위디스크 '양진호' 사건이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지극히 개인의 인격의 문제로 정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의 가해자인 그 네이버 임원과 그 임원의 문제를 알면서도 비호한 네이버 CEO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태도는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 교리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말 그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진짜 서글픈 것은, 그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 지옥을 탈출하지 못했던 이유 또한 그의 발목에 채워진 '능력주의'라는 쇠사슬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루저'로 낙인찍히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리야 하는 이 사막한 시대에 난 내 자식들과 젊은이들에게 어떤 지혜와 어떤 철학을 제시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뿐이다.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성공의 거친 윤리에서 돌아와, 능력주의의 폭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 - 능력주의의 폭정)의 서문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올릴 시점에 보도된 기사에는 피해자분의 구체적인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피해자분의 연령을 이, 삼십 대의 젊은 분이라고 생각했다.(최근 주변에서 이십 대 젊은이의 자살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엊그제 올라 온 기사로 그분이 사십 대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내게는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슬픔 또는 공분이 그 당사자의 나이, 가정 상황 등 주변 환경에 따라 그 무게감이 달라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나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로 삼십 년의 사회생활 동안 희로애락과 굴곡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한 가장이 이 척박한 세상의 안식처이며 버팀목인 가족을 두고 그런 결심했을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좀 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