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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15. 2021

화가 나다 vs 화를 내다

'화가 나다'와 '화를 내다'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 대부분이 헷갈려하는 표현이다. '화를 나다'나 '화가 내다' 등으로 조사 실수를 하거나 아예 '화가 나다'와 '화를 내다'를 바꿔서 말하기 일쑤다. 그래서 이 표현을 써야 할 때는 잠깐 망설이는 게 느껴질 정도다.

         

우선 동사와 조사를 잘 짝지어 줘야 하다. 한국어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실수를 많이 하는 부분은 단연 '조사'다. '조사'가 없는 언어도 많은 데다가 '조사'를 이해하더라도 한국어 '조사'의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입장에서 뚜렷하게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어 의미 전달에서 '조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조사 실수를 했을 때 한국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 오히려 '시제'나 '순서'를 틀려도 대충 의미 전달이 되지만 '조사'를 틀리면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아침에 밥을 먹어요/먹었어요/먹을 거예요'나 '아침에 먹었어요 밥을 나는' 등은 말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나를 오늘 아침이 밥은 먹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의 머릿속 회로는 엉켜버린다.

         

그다음 문제는 '나다'와 '내다'를 구분하는 것이다. '나다'는 저절로 생긴다는 의미다. '땀이 나다' '여드름이 나다' '병이 나다' 등 몸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나 '생각이 나다', '기억이 나다' 등 머릿속에서 생기는 것, '시간이 나다'도 어쩌다 시간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가 나다'는 '화'라는 감정이 그저 내 안에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것이며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이와 다르게 '내다'는 밖으로 나가게 하다, 표현하다, 일부러 만들다는 의미가 있다. '돈을 내다' '신청서를 내다' 등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의미가 있고, '소리를 내다', '시간을 내다' 등은 주체가 일부러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며, '화를 내다' '짜증을 내다' 등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냈다는 의미다. 따라서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가장 직관적으로 이 표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꿰뚫는 하나의 문장을 생각해 내야 한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가 났어요. 하지만 저는 친구에게 화를 내지 않았어요."

"저는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 안에 생긴 감정이지만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렇지만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의지와 선택의 문제다. 화가 나서 화를 낼 수도 있고,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고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화가 날 때마다 당연한 듯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화를 내는 것이 의지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고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조절하려고 명상도 하고 약도 먹고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화'가 누군가를('나'를 포함해서) 이해하는 하나의 준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화'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화가 나는 대상, 상황, 빈도, 강도까지 이미 네 축인데 여기에 화를 내는 대상, 상황, 빈도, 강도까지 더해져서 적어도 여덟 개의 변수를 가지고 설명해야 하니 말이다.          


마치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의 권리라는 듯 자초지종도 살피지 않고 화가 생기면 무조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화가 나는데 왜 화를 내면 안 되느냐고 한다. 한편 언제 화를 낼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게 가장 미칠 노릇이다. 특정 상황에서 화를 내는 패턴이라면 싸움을 피할 수도 있을 테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과는 항상 가드를 올리고 있어야 하는 피곤한 상황이 지속된다. 반면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화 받이'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화 받이' 역할을 거부하고 맞받아치면 싸움이 일어난다. 만약 그 관계가 가족이고 그 장소가 집안이라면 집은 곧 냉전과 백병전이 반복되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화를 내는 사람은 갈등을 줄이기 위해 화를 참아 보겠다고 하지만 수시로 일어나는 화를 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참다가 결국 폭발을 하게 되면 그 공간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가장 좋은 건 화가 생기는 걸 줄이는 거겠지만 저절로 생기는 걸 어떻게 하랴. 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의 상대방은 흔히 범죄의 피해자들이 빠지기 쉬운 '내 안에서 원인 찾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특별히 만만하게 보고 '화 받이' 역할로 찍었다기보다는 자기도 자신이 그 관계에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몰랐던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자신의 '화'를 알아차린다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장 화나게 하는 대상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식이거나 배우자이거나 부모이거나 애인이거나 가까운 친구이거나... 그렇다면 내 경우는 어떤가? 나를 가장 화나게 했던 대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였다. 우리 아이는 순하고 수더분한 기질의 아이는 아니다. 나도 부모가 처음이었기에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아이가 일부러 나를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이를 다그치다가 안 되면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좌충우돌 육아과정을 거치고 부모교육도 받고 내가 부모로서 성장하면서 이제 아이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대상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던 허무맹랑한 나의 기대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고 나서야 진짜 내 아이와 만나게 된 것이다. 고루하고 촌스러운 자기 생각이 세상의 기준인 양 일방적으로 화를 쏟아내는 사람들과 허구적인 기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화를 냈던 내가 뭐가 다른가? 게다가 아직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자기를 전혀 방어할 수 없었던 아이는 얼마나 더 억울하고 답답했을까?

     

나와 아이가 같이 커 가면서 나는 이제 아이를 대상으로 화가 나는 빈도가 많이 줄었고 화가 나도 강도가 그리 강하지 않다. 더불어 아이에게 화를 내려다가 거둬들이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이는 “엄마 화났어? 화내지 마.”라고 단속을 한다. 그럼 나는 “아니야, 화 안 났어. 화내는 거 아니야.”라고 대답하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가 안심하도록 웃음을 지어 주곤 한다.   

  

그렇다면 화를 내는 것이 꼭 나쁜 것일까? 어떤 경우라도 화를 내면 안 되는 걸까? 언제 나는 화를 내기로 선택하는가? 어느 날 손주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뭔가 손주에게 상처를 받은 듯이 보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물다. 평소에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할머니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할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할머니가 뭘 물어도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이가 일부러 할머니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가장 편한 대상에게 가장 조심성 없이 대했을 뿐이다. 나는 그날 아이와 잠자리에 누워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머니에게 왜 먼저 인사하지 않는지, 할머니의 질문에 왜 대답하지 않는지 물었다. 아이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아이가 항의하듯 묻는다. “엄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나는 순간 화가 나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화를 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일어나서 앉았다.     

“일어나서 앉아 봐.” “엄마 화났어. 그리고 화내는 거 맞아.”

나는 만약 엄마나 할머니가 며칠 동안 아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지만 없는 것처럼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아이의 얼굴이 금세 찌푸려졌다.

“슬프겠지?” “응” “네가 할머니한테 그렇게 행동하면 할머니도 슬퍼.”

“네가 원하면 숙제 안 해도 되고 학원 안 가도 돼. 그런데 이것만은 안 돼. 할머니한테 함부로 구는 건 안 돼.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 못 해도 그렇게 해야 돼. 그걸 지키지 않으면 화내고 야단칠 거야.”

아이는 입술을 삐질삐질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왜 울어?” “할머니가 슬플 줄 몰랐어.”

“이제 알았지? 알고도 계속 그렇게 하는 건 진짜 나쁜 거야. 알면서도 사람을 계속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 세상에서 제일 나쁜 행동이야. 내일부터 엄마가 지켜볼 거야.”     

뭔가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작정하고 화를 낸 효과가 요 며칠 지속되고 있다. 아침저녁 인사, 들고 날 때 인사, 이름 부르면 대답하기, 좀 더 친절하게 말하기 등.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큼은 화내도 되는 영역으로 암묵적 동의가 됐으니 한 번씩 기억을 되살려 주면 될 듯하다.      


나는 언제 화가 나는지 또 언제 화를 내는지 들여다보면 나를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다’와 ‘내다’ 사이의 거리를 잘 조절하기 위해서 마음속 거울을 옷소매로 연신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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