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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Nov 15. 2021

내 직업은 모국어를 낯설게 보는 일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내 생각에 가르치는 일의 본질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내 안에 가르치려는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 낯설어하는 사람의 눈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즉 모국어인 한국어를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낯설게 보기를 유지하지 못하면 이 일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좀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매 순간 흥미롭다. 한국어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무릎을 치게 하는 ‘매력적인 오답’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른 인생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의 일부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하루 ‘한국어’에 대해서 알아 가면서 내 가슴속에 북이 울리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둥 둥 둥 둥 둥 둥 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둥.     

정말 오랜만에 듣는 북소리이고 설렘이었다. 사람들은 운명의 상대와 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나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끔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랬다. 나는 금세 ‘한국어’와 사랑에 빠졌다. 내 가슴을 가장 뛰게 했던 것은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 한국어에 담겨 있는 비밀을 알아 가는 즐거움이었다. 마치 째깍째깍 시계 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무브먼트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한국어 안에서 수많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어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 속으로 조금씩 걸어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 계획이 바뀌었고 방향이 바뀌었다.

              

말을 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기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인식할지언정 단어의 의미나 문법 관계 등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호흡 명상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들고 나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N₂(질소), O₂(산소), CO₂(이산화탄소) 등 공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분자식을 생각하면서 숨을 쉴 필요가 뭐 있겠나?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문장의 호응이나 문법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문법과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모국어의 자동화 기능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로 말하려고 할 때 아무리 외국어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단어와 문법을 점검해야 한다. 그 과정은 긴장되고 에너지가 많이 쓰인다. 그렇지만 모국어는 그 과정이 필요 없다. 아무 검열과 점검 없이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모국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공기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 새삼스러울지는 몰라도 이상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위대한 편안함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게 바로 내 일이다!!   

           

처음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고서 몇 년은 열에 들뜬 채로 보냈다. 한국어 교수법을 배우는 것과 진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하늘땅만큼 차이가 크다. 진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하늘땅만큼 더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국적과 연령과 개성을 가진 진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매력이 무한대로 증폭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한 무한대의 경우의 수가 생긴다. 그 매력을 만끽하기에는 내 경험과 능력이 너무 미천했다. 매일매일 실수투성이였고 실수할까 봐 매 순간 고양이 걸음을 걸어야 했다. 일본어권 학생에게 통했던 설명이 영어권 학생에게는 통하지 않거나 그 반대 거나. 이런 경우는 여러 조합으로 가능하다. 내 실수를 귀신같이 잡아내는 언어 천재 학생들도 있었고 학생들이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내가 한 실수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내 한 마디가 학생들에게는 진짜 한국어로 각인된다고 생각하면 실수한 날은 잠이 안 왔다. 밤새도록 최대한 교사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실수를 되돌릴 방법을 고민했다. 수업하는 시간을 빼고 하루에 7-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교안을 썼지만 이상하게 힘들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약간 신들린 듯싶기도 하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일을 오래 해 오는 동안 교실에 너무너무 들어가기 싫고 출근하기도 싫었던 슬럼프 기간도 있었고 세상에 나보다 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오만함으로 충만했던 때도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 이 일은 나와 내 아이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밥벌이의 의미로 자리잡았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매우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일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으로 이 일을 반복하면서 내 안의 북소리는 멈춘 지 오래고 일터에서 하루 종일 걸치고 있어야 했던 정장과 구두 같은 답답함과 피로감마저 느껴진다.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 돌파구를 '글쓰기'에서 찾기로 했다.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치는 일은 어느 정도 표현과 소통의 부자유가 전제된다는 측면에서 문학이나 글쓰기와는 반대 지점에 있다. 먼저 무엇보다 규칙이 중요하다. 규칙을 먼저 숙지한 후에 불규칙이나 예외를 가르친다. 어떤 언어에나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언어의 모호한 부분, 의미의 여백을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고 하면 학생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단어와 표현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장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예문을 들어 줘야 한다. 창조적인 표현, 시적 허용 등은 학생들이 의미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면 허용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만 사용한다. 전 시간에 가르친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 다음 단어를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 시간에 다섯 개의 단어를 가르쳤다면 다음 시간에 그 다섯 개의 단어로 여섯 번째 단어를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 안에 완수해야 하는 고난도의 미션이며 꽤 스릴 넘치는 과정이다. 학생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우뚱 기울었던 목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면 그날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만족감과 성취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난도의 미션을 만족스럽게 수행했다는 성취감은 내 머릿속에 뻗어나가는 생각들을 한정된 단어와 표현 안에 가두는 것 같은 답답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나는 자주 초급 수준의 모국어에 갇혀 있는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내 학생이었던 영어 강사는 그래서 일부러 대학원 수준의 어려운 강의를 녹음해 놓고 자주 듣는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나에게 특히 이 일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내 안에서 이 일이 가진 의미들의 비중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이미 비밀의 숲이 아니게 되었고 나에게는 이제 가르치는 일만 남았다. 게다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교감하면서 반짝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가르치는 일도 점점 각종 행정 처리들의 부담감으로만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하지만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몸과 마음은 지쳤다. 또다시 길을 잃은 느낌이다. 그래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얼마 전 내 삶의 원형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가 그것과 통한다는 것을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나는 항상 아웃사이더, 이방인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살고자 했고 낯선 것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내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삶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내 삶의 원형이 가장 익숙한 모국어를 낯설게 봐야 하는 직업으로 나를 이끈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내 삶의 원형이 또다시 나를 어디로 이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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