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4월의 어느 밤, 술자리

by 낫낫

흐린 봄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잔들이 여럿 놓여 있었고,

술기운이 오른 공기는 조금 붉고, 조금 흐릿했다.


그런 밤에는

사람들이 평소에 삼켜두었던 말들을 꺼내놓는다.

조심스럽게가 아니라, 한꺼번에.


두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취한 채로 장난처럼 우리가 걸었던 전화를

그가 받지 않았다는 것.

하필 결혼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는 것.

그래서 더 섭섭했다는 것.


그 말들은 가벼워 보였지만,

가볍지 않았다.


조용하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차까지 빌려주는 사람은 처음 봤어.

너무 다 퍼주는 거 아냐?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까지 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취한 사람의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도 그런 적이 많다.


차를 빌려주는 것도,

그저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결론으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호구 잡힌 것 같아.”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괜찮은 척한다고 했다.


누군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그 사람 자랑 좀 해봐.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우리가 모르잖아.”


그 순간, 공기가 식었다.

봄밤인데도

그 테이블만 회색빛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왜 내가 그를 설명해야 할까.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증명해야 할까.


차도, 시간도, 마음도

내가 선택해서 건넨 것들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그래, 내가 호구다.”


그 말은

항복이 아니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는

방식의 선택이었다.


술자리는 흐지부지 끝났고,

봄밤의 공기는 여전히 흐릿했다.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말들이 천천히 다시 떠올랐다.


과연 뭐가 맞는 걸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은

그를 향한 것도,

친구들을 향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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